장엄하고 아름다운 빛과 색채의 예술
우리나라의 단청은 삼국시대의 고분 등에서 그 기원을 살필 수 있으며, 불교의 수용과 함께 더욱 발전되었다. 고구려 고국원왕 때 조성된 황해도 안악의 안악3호분은 석실 벽면과 천장이 각종 그림으로 채화돼 있다. 그중에 주두(기둥의 맨 윗부분)에 칠해진 귀면문(도깨비 얼굴을 형상화한 문양)과 천장의 연화문(연꽃 모양의 무늬) 등은 당시의 수준 높은 단청 양식을 보여주는 실례로 꼽힌다.
우리 고대 문헌사료에서는 ‘삼국사기’의 ‘솔거조’에 ‘단청’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왕왕 새들이 날아와서 앉으려고 허둥대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후에 채색이 낡고 바래자 절의 스님이 ‘단청’으로 보수하였는데 그만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다.
고려시대에 단청 문화는 더욱 꽃피웠다. ‘고려사’의 ‘유승단편’에는 “경도(서울)의 호수가 10만 호에 이르렀으며, 거리에는 단청으로 채색한 큰집들이 줄을 이었다”라는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이는 당시 단청이 일반 민가에까지 크게 유행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극단적인 배불정책으로 인해 일반 사찰의 단청은 점차 줄어들었으나 왕실 사찰의 경우는 화려한 단청 양식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궁궐과 사찰의 단청 양식은 서서히 간소화되기 시작한다. 당시 단청에 사용된 진채 안료의 상당 부분이 중국으로부터 고가에 수입되는 것이었다. 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관료들은 이를 사치로 규정하였고, 궁궐의 단청까지 호화스럽게 치장하는 데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단청 업무를 맡았던 관청은 국가와 왕실, 사대부에게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였다. 도화서의 화원은 궁중에서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비롯해 궁궐단청, 의궤화, 교화서의 도설(圖說) 등을 그리는 한편 능묘 비석 인장 예복 등의 장식이나 무늬를 도채하는 일을 했다. 단청장이 화사, 화공 등으로도 불렸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 단청을 하는 과정은 먼저 단청을 올릴 건축물의 바탕을 닦는 데서 시작된다. 전통 아교를 넣고 묽게 끓인 물을 바탕에 바르고 거기에 가칠을 다섯 번 반복한 뒤 초지(草紙)를 마련한다. 초지에 단청할 초안 그림을 그대로 옮겨 도본을 만들고, 문양의 윤곽선에 대바늘로 구멍을 뚫는다.
그 다음에는 초지 무늬를 건물에 올리기 위해서 바탕의 전체 면에 청록색 흙을 바르는 청토바르기를 한다. 그 후 도본(圖本)을 해당 면에 대고 분주머니를 두드리면 본의 무늬에 나 있는 구멍으로 가루가 나와 바탕에 무늬가 박히게 된다. 이렇게 타분작업(打粉作業)이 끝나면 그 본에 따라 광물성 안료로 청·적·황·백·흑의 오색을 입히는데 각기 맡은 색을 찾아 그리며 칸을 메워 단청을 끝내게 된다.
목조 건축물에 단청을 하는 이유는 우선 목재 표면이 갈라지거나 비, 바람 등 자연현상으로 인한 부식과 충해를 방지하고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잡귀를 쫓아내는 벽사의 기능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도 단청이 쓰였다. 또한 건축물의 격을 나타내거나 특수한 건물의 용도에 맞는 장엄성과 위엄을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일례로 궁궐에서 국왕이 정사를 돌보는 가장 상징적이고도 웅장한 건물인 정전에는 국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문양들이 장식되었다. 대개 정전의 단청 양식은 정적이고 웅건한 멋을 지니는데, 독특하고 권위적인 상징무늬와 색채가 호화로우면서도 은근한 기품을 보여준다.
정전의 머리초(보, 도리, 서까래 따위의 끝부분에만 넣는 무늬)에는 연화·주화·모란·국화 등의 문양을 단청했는데, 각기 군자·만사형통·부귀·장수를 상징했다. 정전의 내부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 무병장수를 뜻하는 학·모란 등의 무늬로 장식했다.
단청은 불교나 유교가 성행했던 한국·중국·일본에서 유행했으나, 오늘날까지 단청문화의 전통이 계승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단청장은 197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유병순 기능보유자를 비롯해 양선희 최문정 이욱 전승교육사 등이 후학 양성과 단청문화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자료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