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염원 담은 우아하고 현란한 ‘왕과 왕비의 춤’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는 왕이 춤을 추었다는 기록(정종 2년, 1400년 3월 4일)이 남아 있다. “연향을 베풀고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세자가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세종실록’(1418년 12월 15일)에도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베푼 잔치에서 “두 분 상왕(태종과 정종)이 서로 붙잡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적혀 있다. 흥의 DNA는 결코 왕들도 비켜 가지 않았다.
만약 왕들이 추던 춤이 궁금하다면,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太平舞)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태평무는 나라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리는 뜻을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구한말의 이름난 고수(鼓手)이자 무용가였던 한성준이 경기 무속춤을 재구성하여 추었던 춤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성준은 고종과 대원군 앞에서 멋진 춤사위를 펼쳐 ‘참봉’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전설적인 춤꾼이다.
경기 무속춤 중에는 ‘왕꺼리’라는 춤이 있다. 이 춤은 무속인들이 왕을 위해 추던 춤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왕꺼리가 조선의 임금이 추었다고 해서 생긴 ‘옛날 춤’에서 유래했다는 게 한성준의 주장이다. 한성준은 일종의 궁중 무용이었던 이 옛날 춤이 변하고 변해서 전해 내려와 ‘왕꺼리’가 된 것을 자신이 옛 장단도 찾아내고, 형식도 훨씬 고전에 충실하도록 고치고, 춤 이름도 ‘태평춤’이라 바꿔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태평무라는 이름에서는 빼앗긴 나라에 살던 춤꾼의 숨겨진 염원이 엿보인다(조선일보 1931년 11월 8일 ‘조선춤 이야기’ 코너, ‘조선음악무용연구회 한성준’ 기사 참고).
태평무는 왕과 왕비의 춤이다. 무용가가 왕과 왕비의 복장을 갖추고 궁중풍의 웅장하고 화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한성준은 이를 두고 “그야말로 팔 하나 드는 것과 다리 하나 떼어놓는 것을 점잖게 유유하게 추는 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태평무의 춤장단은 경기도 도당굿(도당에 모여 그 마을의 수호신에게 복을 비는 굿)의 장단을 승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주 음악은 징, 장고, 꽹과리, 바라, 대금, 해금, 피리로 연주한다. 춤장단은 낙궁(무대 앞으로 나갈 때의 장단), 진쇠(8분의 12 박자로 율동성이 강한 장단), 터벌림(8분의 15 박자의 무게감 있는 장단), 도살풀이(4분의 6 박자의 흥겨운 장단)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다른 춤장단에 비해 구성이 복잡하고 까다롭다.
이러한 장단의 변화에 맞추어 독특한 장단사위(발동작)가 펼쳐진다. 태평무를 출 때는 바닥에 발이 붙어 있지 않는다고 표현될 정도로 발동작이 화려하다. 겹걸음, 잔걸음, 무릎 들어 걷기, 뒤꿈치 꺾기 등 디딤새의 기교가 현란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은 절제미를 보여준다. 태평무는 춤추기가 굉장히 어려운 춤으로 꼽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마치 엇박자를 타는 것처럼 장단 사이로 동작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장단 사이를 노니는 듯한 발동작은 태평무만이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태평무의 춤사위는 섬세하고 우아하며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다. 태평무는 춤을 추고 또 이어받은 이들의 기질에 따라 그 색깔과 느낌도 다르게 다가온다. 이동안류의 춤은 서민적인 소박함과 귀족적인 정서가 혼합된 형태로 흥과 멋, 장중함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강선영류의 춤은 엄숙함과 장중함이 배어 있고, 율동이 크면서도 팔사위(팔의 동작)가 우아하고 화려하여 춤의 기품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한영숙류의 춤은 장단에 맞게 춤동작이 변화하며, 민첩하면서도 세밀한 발디딤새가 특징이다.
태평무는 우리나라 춤 중에서 가장 기교적인 발짓춤이라 할 수 있는 공연예술로서 민속춤이 지닌 특징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 자락과 함께 펼쳐지는 현란한 발동작과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손동작은 세계 유수의 춤에 견줄 만큼 예술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8년 한성준의 제자인 강선영이 태평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것을 시작으로, 현재 이명자 양성옥 박재희 세 명인이 예능보유자로서 활발히 공연 및 전수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선영과 한영숙(한성준의 손녀)에 따르면 한성준은 태평무를 너무 사랑해 자신이 죽은 뒤 태평무 의복으로 수의를 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영원한 춤꾼인 그는 어쩌면 땅속에서라도 나라와 국민의 평안을 위해 춤을 추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료 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