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역시 예상조차 못해 “놀랐다” 다섯 번이나 반복…부친·오빠 등 가족 전체가 문인
2016년 5월 24일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노벨상 관련 질문을 받은 한강 작가가 웃을 뿐 말을 잇지 못하다 겨우 들려준 답변이다. 그리고 8년, ‘아주 멀지만은 않은’ 시간이 흐른 2024년 10월 10일 저녁 8시께 속보가 하나 날아들었다. 스웨덴 한림원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했다는 것이었다.
#해외 유명 베팅사이트도 예상 못한 수상
8년 전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한강 작가는 꾸준히 한 땀 한 땀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2018년에도 ‘흰’으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3년에는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4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역시 한국 작가 최초다.
언젠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기대는 있었지만 2024년에 수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외신도 예상 밖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깜짝쇼”라고 평가했고, 프랑스 르피가로는 “한강은 유력 후보들 명단에 없었다. 온라인 베팅사이트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고 보도했다.
노벨문학상은 후보 명단까지 비밀이라 공식적인 후보작도 없다. 그래서 베팅사이트들의 배당률 순위가 후보 명단을 대신하곤 한다. 영국의 베팅사이트 나이서 오즈는 호주 소설가 제럴드 머네인(배당률 4.5배)이 가장 유력하다고 관측했고, 중국 작가 찬쉐(배당률 5배), 호주 작가 알렉시스 라이트(배당률 8배), 카리브해 영연방 출신 자메이카 킨케이드(배당률 8배), 캐나다 시인 앤 카슨(배당률 10배) 등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작가 중에는 소설가 한강을 비롯해 시인 김혜순, 소설가 황석영 등이 거론됐지만 나이서 오즈가 배당률 순위를 공개한 26명의 작가에는 아무도 포함되지 못했다. 또 다른 유명 베팅사이트는 중국 찬쉐가 가장 유력하다고 봤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스 작가 에르시 소티로풀로스 등도 배당률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역시 한강 작가의 이름은 없었다.
한강 작가 역시 전혀 예상조차 못했다. 그래서 노벨위원회로부터 수상 소식을 듣자마자 한강 작가는 “놀랐다(Surprised)”는 말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노벨위원회 유튜브 계정을 통해 공개된 인터뷰에서 한강 작가는 “아들과 저녁 식사를 막 끝낸 참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저녁 8시쯤, 매우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정말로 놀랐다”며 “아들 역시 놀랐다. 영광스럽고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두 번째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 아시아 다섯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채식주의자’를 영문으로 번역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한강 작가와 공동 수상한 영국인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는 2016년 6월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노벨상 관련 질문을 받고 “한국에서 노벨상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이 약간 당황스럽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강 작가는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24년 만에 나온 두 번째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다. 아시아 국가 국적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2012년 중국 작가 모옌 이후 12년 만이다. 2013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인도),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일본), 1994년 오에 겐자부로(일본), 그리고 모옌 이후 한강 작가는 아시아 국적 국가 작가로는 다섯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최초다.
최근 대한민국은 문화강국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K-팝 스타 방탄소년단 등 다양한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무대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쌓아가고 있다. 여기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의 문을 열었다.
#‘채식주의자’…‘소년이 온다’…‘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는 1970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와 풍문여고와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잡지 ‘샘터’ 기자로 근무하면서 1993년 계간지 문학과사회을 통해 ‘얼음꽃’ 등 4편의 시로 등단했고, 이듬해인 1994년에는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붉은 닻’이 당선돼 소설가로도 등단했다.
이후 한강 작가는 ‘여수의 사랑’, ‘검은 사슴’, ‘내 여자의 열매’, ‘그대의 차가운 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등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발표하며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소설에 국한하지 않고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동화 ‘내 이름은 태양꽃’, ‘눈물상자’,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2007년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세 작품을 묶은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발간했는데, 이 작품이 2016년에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시선을 받았다. 또 2014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장편 ‘소년이 온다’, 2021년에는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낸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발표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깊은 어둠과 상처를 소설로 다뤄냈다.
한강 작가는 이미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여럿 수상했다. 2005년 ‘몽고반점’으로 이상문학상을, 2010년 ‘바람이 분다’로 동리문학상을, 2015년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으로 황순원 문학상을, 2018년 ‘작별’로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다. 해외에서도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이후 2017년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밀라파르테 문학상, 2018년 ‘채식주의자’로 스페인 산클레멘테 문학상, 2023년 ‘작별하지 않는다’로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버지, 오빠, 동생에 남편까지 문인가족
한강 작가의 아버지 소설가 한승원 작가는 '이상문학상 수상 부녀'로도 유명하다. ‘해변의 길손’으로 1988년 제1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한승원 작가는 1966년 단편소설 ‘목선’으로 등단해 ‘아제아제 바라아제’, ‘추사’, ‘새터말 사람들’, ‘동학제’, ‘멍텅구리배’, ‘다산의 삶’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한승원 작가도 이상문학상 외에 김동리문학상, 순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뿐 아니라 가족이 모두 문인이다. 오빠 한규호(필명 한동림)는 ‘유령’ 등을 펴낸 소설가이며, 남동생 한강인도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있다. 한강 작가의 남편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는 문학평론가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으로 등단해 2010년 제21회 김달진문학상, 2011년 유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강 작가와 홍용희 교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나이와 이름 등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평소 아들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은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노벨위원회와 한 인터뷰에서 “아들과 차를 마시면서 오늘 밤 조용히 축하하고 싶다”고 했다.
‘소년이 온다’로 블랙리스트, ‘채식주의자’는 청소년 성교육 유해도서
2016년 한강 작가는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날상을 수상했지만 그 흔한(?) 대통령 축전은 받지 못했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대통령 축전을 건의했지만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거절했다. 이유는 이미 한강 작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훗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팀의 문체부 압수수색 등을 통해 드러났다.
한강 작가는 2016년 12월 5·18 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치유의 인문학’ 강좌에서 “‘소년이 온다’를 낸 뒤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5·18이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문체부가 주최하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세종도서(옛 문화부 우수도서) 선정·보급 사업 심사에서 배제돼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도 ‘블랙리스트’인 것으로 보인다.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2023년 11월 경기도교육청이 각 학교에 보낸 공문 ‘학교 도서관 폐기 논의 권고 도서’에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유는 청소년 성교육에 유해하다는 것이었다. 지난 5월 강민정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기도교육청에서 받아 공개한 ‘경기도 학교도서관 성교육 도서 폐기 현황’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포함돼 있었다.
이에 대해 경기도교육청은 “2023년 폐기된 성교육 도서는 각 학교가 운영위원회를 열어 자율적으로 판단해 정한 것으로 특정 도서를 강요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