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손길을 품은 화살통, 민속예술이 되다
예부터 활과 화살은 수렵과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로 취급되었고, 화살을 온전히 보관하는 전통 또한 그 궤를 함께하며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의 유산에서도 다채로운 전통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쌍영총의 기마도와 수렵도 등의 벽화에서 등에 매고 다니던 화살통을 발견할 수 있고, 신라와 백제 고분에서는 화살통을 장식하는 꾸미개가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궁술 훈련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전통 또한 필수적인 군수품으로 자리잡게 됐다. 또한 무인들뿐만 아니라 문인들도 심신수련을 위해 평소 활쏘기를 즐기게 되어 각종 재료로 치장된 화살통이 등장했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 공전에서는 화살통과 같은, 활과 화살의 보조도구를 만드는 장인을 ‘통개장’(筒介匠)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궁시장(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과 함께 통개장 즉 전통장의 일이 중요 영역으로 다뤄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세종 때의 기사를 보면, 전통이 왕의 하사품이나 포상용으로도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총포와 화약의 발달로 활의 군사전략적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화살통을 만드는 장인들의 입지도 좁아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활쏘기가 취미생활의 하나가 되었고 전통 역시 점차 미술적 아름다움을 지닌 공예품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통적인 화살통은 쓰이는 재료에 따라 그 명칭이 다양하고 만드는 방식이나 쓰임새도 달라진다. 대나무로 만드는 죽전통, 한지로 만드는 지전통, 오동나무로 만드는 오동나무전통, 거북 껍질을 이용해 만드는 대모전통, 벚나무 껍질로 만드는 화피전통, 투갑상어 껍질로 만드는 어피전통, 나전으로 문양을 내는 나전칠전통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중 오동나무전통은 습기와 좀을 막아주는 기능이 뛰어나 전쟁과 수렵 때 많이 사용되었고, 모습이 미려한 나전칠 전통은 예부터 매우 값이 나가는 고급 장식품으로 취급되었다.
전통 중에 가장 널리 쓰였던 죽전통의 제작 과정을 보면, 하나의 화살통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인고의 시간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죽전통 만들기는 사실상 대나무 채집으로 시작된다. 2년 이상 된 왕죽의 크기와 색깔을 따져보고 표면의 색깔이 맑고 투명한 것을 골라 밑동을 잘라낸다. 채집된 대나무는 지하 50cm 정도 깊이를 파고 땅에 2년 이상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지하에 묻어 두는 이유는 대나무의 절(마디)을 삭히기 위해서다.
절을 삭힌 대나무는 특별히 제작된 드럼통에 넣어 3일간 삶아 진을 뺀다. 대나무가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사전 처리 과정이다. 이렇게 재료가 마련되면 비로소 본 공정에 들어간다. 먼저 문양을 설계하여 초(밑그림)를 잡는데, 가는 붓으로 대나무 표면에 다채로운 문양을 그려 넣는다. 이어 밑그림의 선을 따라 조각칼로 칼금을 주고 골을 파내어 문양의 형태를 도드라지게 한다. 이때 새기는 문양은 대개 십장생, 사군자, 문자 등 장수와 구복의 염원을 구현한 것들이다.
화살통의 본체가 만들어지면 이어 마개와 덮개를 제작한다. 마개는 그늘에서 30일 이상 말린 물푸레나무 등 여문 것을 골라 재료로 쓴다. 그 다음으로 고리목(끈 등을 연결할 수 있도록 고리 역할을 하는 나무)을 만들어 붙인다. 주로 대추나무를 자르고 조각해 민어풀로 본체에 붙인 뒤 실로 묶어 풀이 완전히 굳을 때까지 하루쯤 기다린다. 이어 주칠을 하여 그늘에서 하루 이상 말리게 된다.
뒤이은 작업은 장석 만들기. 놋쇠 판을 펴서 못 구멍을 낸 다음 톱질을 하여 마개의 테두리를 만든다. 작업 사이사이에 칠이 마른 전통에 솔질을 하여 윤기를 내고 습기 방지를 위해 옻칠 등을 한 다음 건조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된다. 여기에 열쇠를 겸하는 덮개장석을 만들어 장착하면 마침내 하나의 죽전통이 완성된다.
1989년 전통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김동학 선생은 죽전통 지승전통(종이를 꼬아 만든 화살통) 화피전통 나전칠전통 등 다양한 전통적인 화살통을 현대에 재현해 낸 주인공이다. 여러 가지 전통을 만들려면 각기 다른 재료와 도구를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예술적 안목과 고도의 기술도 지녀야 한다. 그는 4대째 내려온 집안의 기예를 이어받고 또 연구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한때 생계를 위해 전통이 아닌 가구를 제작해야 했던 그의 사연은 무형유산을 잇고 지켜 나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