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떼는 동생 미련 남은 형님
▲ 지난 2003년 최종건 SK 창업주의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최태원 SK 회장(왼쪽)과 최신원 SKC 회장. 최근 사촌형제 간의 계열분리설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 ||
그러나 SK 측은 계열분리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것조차 불편한 모양이다. 계열분리 관련 질문에 대해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번 최 회장의 지분 처분 목적은 계열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조만간 계열분리가 이뤄질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최태원 회장의 SK케미칼 지분 처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최태원 회장은 종전까지 SK케미칼 지분 중 보통주 5.86%(121만 4269주)와 우선주 3.11%(8만 7515주)를 보유해 총 지분율 5.16%(130만 1784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보통주 전량을 처분해 우선주 3.11%만을 남겨놓게 됐다. 총 지분율로 치면 0.37%로 주저앉은 셈이다. 우선주엔 의결권이 없다. 의결권 행사 지분으로만 놓고 보면 최 회장은 SK케미칼과 완전히 갈라선 셈이다.
SK그룹이 지주회사제로 바꾸면서 SK케미칼과 SK케미칼이 지배하는 SK건설을 지주회사제에서 제외할 때부터 SK그룹과 SK케미칼 계열의 분리는 시간문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 회장의 SK케미칼 지분 처분 배경에 대해 SK 측은 “대주주로서 가용할 수 있는 현금 확보 수단일 것”이라며 계열분리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SK 측이 극구 부인에도 재계 쪽에선 SK가 계열분리 수순을 밟고 있다는 데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고 최종건 SK 창업회장의 아들들인 최신원(SKC 회장)-최창원(SK케미칼 부회장) 형제와 고 최종현 2대 회장 아들들인 최태원(SK그룹 회장)-최재원(SK E&S 부회장) 형제 간의 분가는 이미 예견돼 온 일이다. 이런 까닭에서 지난 4월 SK그룹의 지주회사제 전환 발표 당시 SK케미칼은 지주회사제에서 제외된 반면 SKC가 여전히 그룹 지주회사제 포함된 것에 의아해 하는 시선도 있었다. 최신원 회장의 SKC는 SK그룹 지주회사인 SK(주)가 지분 43.64%를 보유해 절대적 최대주주로 군림하고 있어 조기 독립이 쉽지 않아 보인다.
SK 측 주장대로 최태원 회장의 SK케미칼 지분 매각이 계열분리와 무관한 것이라면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최 회장은 이번 매각으로 978억 원가량을 챙겼다. 7월 18일 현재 새 지주회사인 SK(주) 주가 18만 원을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SK(주) 지분 54만여 주, 즉 1.45% 가량을 사들일 수 있는 금액이다(의결권 있는 보통주 기준).
최태원 회장의 SK(주) 지분율은 0.97%에 불과하다. 최 회장은 SK케미칼 지분 처분을 통해 현재의 빈약한 지배력을 두 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실탄을 마련한 셈이다. 최 회장은 현재 최태원→SK C&C→SK(주)→나머지 계열사들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실질적 지주회사제로 전환하기 위해선 자신의 SK(주) 지분율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다.
한편 분리 대상으로 거론되는 최창원 부회장의 SK케미칼 또한 그동안 꾸준히 실탄 확보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부터 10여 차례에 걸친 자사주 76만여 주 매각으로 총 167억 원을 마련했다. 매각된 자사주는 모두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였다. 기업 지배력은 종전대로 지키면서 현금만 확보해 온 셈이다.
SK케미칼은 지난해 11월 동신제약 합병에 이어 최근 매출 3000억 원 내외 규모의 제약사 인수를 추진하는 등 몸집불리기에 한창이다. 최태원 회장 지분이 빠져나가 SK케미칼은 우호지분을 다소 잃었지만 여전히 최창원 부회장 우호지분율이 23.87%(보통주 기준)로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이렇다 보니 시선은 아직까지 SK그룹 울타리 안에 있는 최신원 회장의 SKC에 쏠린다. 최대주주인 SK(주) 지분율(43.64%)에 비해 최신원 회장 지분율(2.67%)이 크게 처져 있다. 문제는 최신원 회장 개인의 지분 경쟁력인 셈이다. 물론 최신원 회장 측도 나름대로 지배력 확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최신원 회장은 지난 5월부터 지금까지 13억 원가량을 들여 SKC 지분 5만 3000여 주를 사들였으나 아직 지분율이 3%에도 못 미친다. 최 회장 계열로 분류되는 SKC 계열사는 SK그룹 계열사 납품 의존도가 크다.
최창원 부회장의 SK건설도 SK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크다는 점에서 공통된 고민을 안고 있다. SK그룹의 경영 화두인 ‘따로 또 같이’의 원칙, 즉 경영은 독자적으로 하되 기업이미지는 공유한다는 이 원칙이 최신원 회장 형제에게도 아직은 필요한 것이다.
최창원 부회장의 독립계획은 지난 몇 년 동안 증시를 통해 합법적이고 반복적인 주식 매입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사촌 간에 충분한 합의가 있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최신원 회장이 독립에 필요한 최소한의 지분 확보도 아직 못하고 있다는 점. 이번 지주회사제 전환에도 최 회장이 동의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최신원 회장은 ‘어떤 배려’를 받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최신원 회장은 기본적으로 최태원 회장이 ‘단독 상속자’가 아니라 SK를 물려받은 최씨 일가의 ‘대표 경영자’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지주회사제 전환을 앞두고 최태원 회장이 워커힐 지분을 SK네트웍스에 증여한 것은 최신원 회장의 동의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최신원 회장이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워커힐에 대한 연고의식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최태원 회장의 지주회사 지분 확보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고 재원도 마련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재계에선 이제 남은 것은 최신원 회장의 독자적인 분가계획일 것이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