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누가 ‘그분’에게 ‘토’를 달랴
▲ ‘척’하면 ‘착’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지하벙커에 설치된 국가위기상황센터와 비상경제상황실을 둘러보고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 ||
전쟁을 암시하는 듯한 워룸에 비상경제상황실을 만들었을 당시 이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실물경제를 살려야 할 판에 구중궁궐인 청와대에서, 그것도 가장 깊숙이 숨어있는 지하벙커에 들어가는 것이 맞느냐는 비판부터, 워룸을 사용하는 것은 경제위기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더욱 크게 한다는 지적에 이어 대통령이 나서서 쇼를 하고 있다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청와대는 비상경제상황실을 차릴 만한 사무실을 구하기 어렵다는 물리적 이유와 함께 느슨해지기 쉬운 공무원 조직을 다잡기 위해서라며 워룸을 택했다. 국민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불어넣는 동시에 경제난 극복을 위해 정부가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미였던 셈이다. 실제 첫 비상경제대책회의를 할 때 워룸에는 ‘튼튼한 경제, 신속한 대처, 철저한 확인’ 등 군부대 구호 같은 문구가 표어 형식으로 붙어 있었다.
여러 가지 비판이 있지만 워룸에서 경제 회복과 관련한 정책 결정이 상당수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정부부처의 한 관계자는 “워룸에서 각종 경제지표에 대한 분석결과 보고와 함께 경기 회복과 관련한 각종 정책들이 보고되고 결정된다”면서 “과거 같으면 정부부처 간 이견이나 토론 때문에 결정이 늦어질 것도 워룸을 거치면 빠르게 진행된다. 재정 조기집행이나 일자리 나누기 등 경기부양책 실시 등도 워룸이 주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워룸에서는 매일 각종 경제지표를 분석해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한편, 경제위기 선제 대응을 위한 각종 정책을 통과시켰다. 이 대통령이 휴가 때도 워룸의 비상연락망을 챙겼을 정도로 이 정부 들어 힘이 워룸에 쏠리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요즘 공직사회에서는 ‘워룸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워룸에서 경제와 관련한 정책 중 상당수를 결정하고 이들 정책이 빠르게 추진되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라면서 “하지만 이 말에는 워룸의 결정 사항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다른 부처에서 반대할 경우 ‘워룸에서 그렇게 결정됐다’고 하면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이 고위 관계자는 워룸의 파워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노후자동차 교체시 세금 감면 정책’을 들었다. 그가 전한 전후 사정은 이렇다.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우리 수출 대표품목인 자동차 산업에 위기가 다가오자 소관부처인 지식경제부에서 노후자동차 교체시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자동차산업 발전방안을 내놓았다.
이는 당장 기획재정부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 정책을 실시할 경우 국제 통상 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지식경제부는 외교통상부에 문의했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반박했고, 재정부는 국제 통상 분쟁 우려가 없다는 외교통상부의 문서를 받아오라고 압박했다. 외교통상부가 문서화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노후자동차 교체에 따른 세금감면안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 사안이 워룸에 들어가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이 대통령이 노후자동차 교체시 세금 감면 정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대통령은 자동차 업계의 구조조정이나 노사관계 개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건을 달았다. 이에 힘입은 지식경제부는 회의 직후 자동차산업 발전방안을 바로 발표했다. 여기까지가 ‘1라운드’다.
그러나 지식경제부가 발전방안을 발표하면서 이 대통령이 언급한 자동차업계 구조조정이나 노사관계 개선을 두루뭉수리하게 넣어서 이런 조건이 들어있었는지 알 수 없게 돼버리자 ‘2라운드’가 시작됐다. 지식경제부 발표의 문제점을 파악한 재정부 측에서 ‘자동차 업계의 구조조정과 노사관계 개선’을 넣어야 한다고 지식경제부에 공세를 폈다.
지식경제부가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번에는 재정부 측에서 ‘워룸에서 대통령께서 하신 말씀이다’라고 강하게 압박했고, 지식경제부에서 손을 들었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정부 발표에 노후자동차 교체시 세금 감면 지속 조건으로 자동차업계의 자발적인 구조조정과 노사관계 개선이 들어가게 됐다는 것이다. 또 국회에서 법안으로 통과될 때도 이례적으로 이런 내용이 부대조건으로 딸려 들어갔다. ‘워룸’이라는 단어가 갖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워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 각국의 회복 움직임 중 가장 빠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미 세계 주요 경제계 인사들이 한국 경제의 ‘그린 슈트’(Green Shoots·새싹과 같은 경기 회복 조짐)를 수도 없이 언급했다. 지난해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 1000포인트 선이 무너졌던 코스피지수는 1400p 선을 넘나들고 있고, 1600원대이던 원-달러 환율도 1200원대로 내려앉았다. 특히 최근 북한의 2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지정학적 위기 고조에도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워룸을 통한 정부의 강력한 경기 부양책이 가져온 효과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이렇게 힘이 세지고 나름의 효과를 내다보니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하나의 정책을 추진할 때 이해관계가 다른 부처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지역 개발안에 대해 국토해양부와 환경부가 충돌하는 것은 부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또 한 부처의 정책이 다른 부처 소관 법률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부처 간 이견 조율과 법률안 검토 등을 거쳐 일을 추진하는 게 순리에 맞다”면서 “그런데 워룸에서 나온 안에 대해서는 이러한 통상적인 충돌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워룸에서 결정됐다는 것은 대통령의 의중이 이미 굳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어떤 점에서는 문제제기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칫 독선으로 흐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또 “최근에는 (워룸에서) 상황만 점검하거나 각 부처의 정책 ‘한건주의’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힘이 집중된 곳인 만큼 그 힘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