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수씨, ‘항로 변경’은 곤란합니다
▲ 조양호 회장. 조양호-최은영 회장의 계열분리에 대한 견해차가 집안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아닌지 재계의 관심이 뜨겁다. | ||
한진해운은 지난 2006년 조수호 회장이 별세한 이후 부인 최은영 회장이 경영을 맡아오고 있다. 한진해운은 사실상 오랫동안 한진가 장남 조양호 회장의 영향력하에 있었다. 지난 2002년 조중훈 창업주가 타계하면서 4남인 조정호 회장의 메리츠금융그룹과 차남 조남호 회장의 한진중공업그룹이 차례로 독립해 나갔지만 3남 조수호 회장의 한진해운은 계열분리를 하지 않고 한진그룹 내에 남은 것.
고 조수호 회장이 오랜 투병생활을 하면서 한진해운 전문경영인들이 회사 운영을 맡아왔지만 경영상 큰 그림은 조양호 회장의 몫이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경영 이력이 없는 최은영 회장이 한진해운 회장직에 올랐을 때 “한진해운에 대한 조양호 회장의 영향력이 더 강화될 것”이라는, 이른바 ‘섭정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동안 한진해운 계열분리설이 나돌 때마다 한진그룹 관계자들은 “그럴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하지만 한진해운 내에선 분가를 향한 움직임이 계속해서 진행돼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지난 12월 1일 한진해운은 지주회사와 사업 자회사로 분할, 한진해운홀딩스라는 지주회사 설립을 알리면서 계열분리의 첫 시동을 걸었다.
조양호 회장의 한진그룹은 ‘정석기업→㈜한진→대한항공→정석기업’ 형태의 순환출자구조를 띠고 있으며 조 회장은 정석기업 지분 25.53%를 보유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조 회장을 향한 최 회장의 한진해운 분할과 지주사 설립은 한진그룹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는 대외적 의지 표명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지주회사 체제 전환 직후인 지난 12월 2일 최은영 회장은 서울 롯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최 회장은 “전 세계적으로 항공과 해운을 같이 하는 곳은 없다”며 “계열분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라 밝혔다. 최 회장은 “지주회사 체제는 남편인 고 조수호 회장이 구상하고 추진해 왔던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한진중공업과 메리츠금융의 계열분리가 이뤄졌듯 고 조수호 회장 몫의 한진해운도 조양호 회장 품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공식 선언인 셈이다. 이날 최 회장은 독자노선에 대한 의지를 강조하려는 듯 시종일관 ‘한진해운그룹’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 최은영 회장. | ||
이런 최은영 회장의 계열분리 의지를 접한 조양호 회장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여러 채널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은 굳이 계열분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조 회장이 “아랫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다”며 최 회장을 보좌하는 전문경영진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 것으로 전해진다. 최은영 회장을 직접 겨냥하지 않았으나 조수호 회장 별세 전후 영입된 인사들이 최 회장의 계열분리 의지를 부추기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최은영 회장은 조양호 회장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계열분리를 해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한진해운의 최대주주는 지분율 5.53%의 대한항공이다. 그밖에 한국공항이 3.54%, ㈜한진이 0.01%를 보유해 조 회장 측 지분율은 총 9.08%에 이른다.
최은영 회장의 한진해운 지분율은 2.36%이며 최 회장의 두 자녀가 각각 1.57%씩을 갖고 있다. 최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법인 양현이 보유한 3.71%까지 합하면 최 회장 측 지분율은 9.21%다. 한진해운에 지분투자 중인 해외자본 등을 최 회장의 우호세력으로 돌린다고 해도 지분율이 10%에 육박하는 조 회장을 제쳐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진해운의 최근 실적 부진 역시 한진해운 계열분리 논란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일 것이다. 지난 2008년 3344억 원이었던 한진해운 영업이익은 2009년 들어 3분기 현재 7804억 원 적자로 돌아선 상태다. 당기순이익도 3203억 원 흑자였던 2008년과 달리 2009년은 3분기 현재 1조 1122억 원 적자를 기록 중이다. 이는 조 회장 측에게 쉽사리 계열분리를 결정할 수 없다는 명분을 제공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12월 2일 기자간담회장에서도 최 회장은 조 회장과의 관계를 고려한 듯 “(조양호 회장과) 수시로 이메일과 휴대전화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말을 보탰다. 그러나 최근 조양호-최은영 두 사람 사이를 심상치 않게 보는 재계 관계자들은 ‘1월 4일 부산에서 치르는 시무식에서 최은영 회장이 계열분리 불가를 밝힌 조 회장에게 반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다. 여기에 ‘최 회장이 부산으로 갈 때 대한항공을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오가는 중이다.
한진 계열분리 과정에서 조중훈 창업주 유산분배를 놓고 형제간 다툼이 벌어졌던 것을 지켜본 재계 관계자들은 조양호-최은영 두 사람 간의 계열분리에 대한 시각 차이가 결국 또 다른 집안싸움을 부를 가능성에 주목한다. 여기에 최 회장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여동생 신정숙 씨의 장녀인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을 놓고 벌였던 범 현대가의 경영권분쟁, ‘정씨 현대냐, 현씨 현대냐’라는 논란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한진그룹과 한진해운 양측은 일관되게 “한진해운은 이미 독자경영을 하고 있으며 조양호 회장과 최은영 회장 간의 갈등은 없다”는 공통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과연 조양호-최은영 두 사람의 계열분리에 대한 견해 차이가 큰 충돌 없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집안싸움을 잉태할 것인지 재계의 시선이 뜨겁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