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세계 곳곳을 누비다 돌아오는 김 전 회장을 포근하게 반겼을 정원의 꽃과 나무들. 과연 법원은 김 전 회장의 발길이 머물던 앞마당에 ‘얼마치’의 값을 매겼을까. 판결문 속으로 들어가보자. 이번 소송에서 키워드가 된 것은 지난 4월 경매를 통해 팔린 방배동 집 마당의 정원수와 자연석의 가치. 만약 방배동 집 경매 당시 감정에서 제외됐던 나무와 돌의 가격이 낙찰가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값진 것이라면 경매결과가 무효가 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 김우중 전 대우 회장 | ||
방배동 집에 대한 법원 감정가는 38억7천4백만원, 최종 낙찰가는 48억1천만원이었다. 이와 비교해보면 정원수•자연석 등은 법원 감정가의 2.28%, 낙찰가의 2.07%에 불과한 가격. 더구나 재판부는 “이들 나무를 팔 경우의 가치는 감정가의 절반 정도인 4천5백여만원”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정원수와 자연석의 값이 빠져 있으니 낙찰은 무효”라는 김 전 회장측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인 원심 결정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최성준 민사51부 부장판사는 “낙찰자가 낸 가격이 법원 감정가보다 9억여원이 비쌌으며 함께 응찰한 9명의 가격도 모두 법원 감정가보다는 높았다”며 “이 같은 상황에서 정원수 등의 가격 8천여만원이 감정가에 보태졌다하더라도 경매는 별다른 영향 없이 진행됐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3일 경매에서 낙찰된 방배동 집은 낙찰 2주 뒤인 4월17일 김 전 회장이 가정부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낙찰 무효소송을 내면서 다시 법정 위에 오르게 됐다. 서울지법 민사52부는 김 전 회장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여 ‘낙찰 무효’ 결정을 내렸으며 이번 판결은 낙찰자인 김아무개씨(52) 등이 항고를 한 데 따른 것이다. 민사51부가 김씨의 항고를 심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초. 그러니까 이번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꼬박 7개월이 걸린 셈이다.
부동산 경매의 항고심을 판결하는 기간으로는 통상의 시일을 훨씬 넘겼다는 것이 법원 경매 관계자들의 설명. 방배동 집을 허물고 고급 빌라를 세울 계획이던 낙찰자 김씨는 ‘판결을 서둘러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부에 내기도 했다. 이처럼 판결이 늦어지자 일각에선 재판이 김 전 회장의 귀국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최성준 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의 가족은 물론 대리인격의 변호사들로부터도 일체의 전화 한 통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직 재벌 총수 자택의 정원수를 감정하는 재판부의 속내도 고민이 많았기는 마찬가지.
최 판사는 “단독주택의 경매에서 정원의 수목을 별도로 감정하는 일은 극히 드문 경우”라면서 “전임 판사들이나 실무자들에게 이 같은 전례가 있었는지 물었지만 모두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그간의 심적 부담을 간접적으로 털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7개월여의 수목 감정 과정을 들어보면 최 판사의 얘기에 고개가 끄덕거려질 법하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김 전 회장의 방배동 집 정원의 꽃과 나무는 모두 30종 5천2백31그루. 웬만한 임야를 떠올리게 하는 숫자다.
먼저 나무의 경우 ▲노향나무 6 ▲모과나무 1 ▲섬잣나무 1 ▲배롱나무 1 ▲조형나무 2 ▲느티나무 1 ▲향나무 10 ▲소나무 20 ▲회귀목 50 등 모두 92그루가 8천1백15만4천5백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정원수 5천1백39그루는 어떤 것들이며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
▲ 김우중 전 대우 회장 방배동 저택의 늦여름 풍경. 무수한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김 전 회장이 귀국하더라도 이 집으 로 들어오기는 힘들게 됐다. | ||
‘장인 정신’마저 느껴지는 이번 감정은 수목 전문 감정인 한 명이 2~3명의 보조 감정인과 함께 지난 7월19일에 시작해 꼬박 40일이 걸려 마쳤다. 그렇게 한 감정 결과를 감정인은 ▲담쟁이덩굴 5백 ▲맥문동 6백 ▲영산홍 1백60, 80, 3백50 ▲철쭉 10, 25, 2백50주… 등으로 정리했다.
하나의 꽃에 여러 개의 숫자가 있는 것은 마당 곳곳에 심어진 것을 각각 따로 구분한 것. 그리고는 다시 각각의 단가를 ▲담쟁이덩굴 3백원 ▲맥문동 6백원 ▲영산홍 8백~1천원 ▲철쭉 8백~5천원 등의 식으로 계산서를 뽑았다. 이렇게 일일이 따진 꽃의 가격은 모두 합쳐 7백49만7천원. 들인 ‘품’에 비해 너무 가격이 낮았을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정원수에 대한 별도 감정 가격을 매기려면 일반적인 수준을 넘는 정도의 수목이 심어져 있어야 한다”며 “‘일반적인 수준’은 결국 토지 가격을 비교해 생각해야 하는데 최고급 주택단지의 토지 가격에 비교해보면 (방배동 집 정원은) 일반적인 수준보다 약간 높은 정도”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애초의 감정가를 문제삼을 만큼 요란스럽게 값을 따질 수준의 정원이 아니라는 것.
이번 수목 감정은 경매 실무에도 새로운 선례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최 판사는 “김 전 회장이 다시 항고를 해서 대법원 판결까지 받는다면 앞으로 단독주택 감정가는 마당의 나무와 자연석 등의 가격을 별도로 따질지 여부를 항상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측은 이번 판결에 대해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다. 김 전 회장의 ‘낙찰 무효’소송을 맡았던 남산법무법인의 임동진 변호사는 인터뷰 요청에 “언론에 할 말이 없다”는 답변만을 비서를 통해 보내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최근 김 전 회장의 ‘연내 귀국설’이 흘러나오는 도중에 내려진 것이어서 더욱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78년부터 방배동 집에서 살아온 김 전 회장은 99년 대우그룹 자구책과 함께 전 재산을 내놓은 당시에도 “집과 안산 농장만은 남겨달라”고 말했을 만큼 이 집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큰아들 선재씨가 묻혀있는 안산 농장은 지난 7월 초 채권단의 요청에 따라 경매처분돼 55억여원에 팔린 상태.
결국 방배동 집은 김 전 회장이 귀국할 경우 ‘돌아갈’ 유일한 곳으로 손꼽혀 왔다. 이 집이 경매에 넘겨지자 김 전 회장측이 가정부를 대리인으로 내세우며 감정가에 문제제기를 한 것도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한 측근은 “(김 전 회장이 현재) 귀국해서 머무를 곳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며 “그렇다고 해도 (김 전 회장이) 있을 곳이 꼭 방배동 집밖에 없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최근 ‘김 전 회장이 국내 대리인을 통해 연내 귀국할 뜻이 있음을 대검 중수부에 전해왔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대해 ‘사실 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이 측근은 “적어도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런 의사를 검찰에 타진한 사람이 없다”며 “설사 그랬다하더라도 검찰이 (김 전 회장의) 귀국 문제를 풀 의지가 있다면 언론에 공개를 하겠느냐”며 연내 귀국 가능성을 낮게 내다봤다. 김 전 회장은 9월 중순 무렵 독일의 한 병원에서 장협착증 수술을 받은 뒤 현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법원은 판결이 내려진 지난 4일 판결문을 방배동 집으로 송달했으며 김 전 회장측이 판결문을 받은 지 일주일 내에 항고를 하지 않을 경우 집은 낙찰자에게 넘겨진다. 지난 4월 경매가 낙찰됐을 당시 법원이 보낸 ‘경매 개시 결정문’은 방배동 집 관리인인 이아무개씨가 받았으며 법원은 이씨를 김 전 회장의 대리인으로 인정했다.
현재 김 전 회장의 자택에는 관리인과 가정부가 살고 있어 판결문 송달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통상 법원의 판결문 송달에 걸리는 10일 안팎의 기간을 감안하면 이달 23일 무렵 방배동 집의 운명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승소 판결을 받은 낙찰자 김씨측은 “변호사들에게 자문을 구해보니 김 전 회장측이 다시 항고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하지만 낙찰 무효 결정이 다시 난다면 법원은 법원이 집행한 경매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며 앞으로의 소송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낙찰 결정이 최종적으로 날 경우 방배동 집에는 예정대로 고급 빌라를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세계 경영’을 외치며 세계 곳곳을 앞마당처럼 뛰어다녔던 김우중 전 회장. 그가 정작 자신의 집 앞마당에 법원 감정가가 매겨지고 빌라가 들어서게 되는 현실을 타국에서 바라보는 소회는 과연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