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제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여운은 4천7백만 붉은악마 들의 ‘일상복귀’를 자못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 이른바 월드컵 후유증. | ||
그날의 흥겨웠던 분위기를 못내 아쉬워하는 상당수 직장인들은 유흥가의 불빛에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일손이 안 잡힌다며 여름휴가를 앞당기는 현상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모처럼 분출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했던 여성들의 금단현상은 더욱 심각한 양상. 다시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증에 걸린 주부들까지 등장한 상태다.
월드컵 후 달라지고 있는 풍경은 역시 유흥가에서 제일 먼저 드러나고 있다. 30~40대의 남성 직장인들이 월드컵 후유증을 애써 술로 풀고 있는 것.
실제로 최근 들어 유흥가에 다시 성인 남성들이 몰려들고 있는 상태. 월드컵 때 열렬히 응원대열에 참여했던 이들이 잊지 못할 ‘6월 축제’를 좀더 곱씹기 위해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월드컵 얘기를 이어가고 있는 것.
월드컵 이후 음주 습성도 사뭇 달라졌다. 탁 막힌 업소를 박차고 나와 노천에서 술을 마시고자 하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는 점도 그 중 하나. 이른바 거리 응원전이 낳은 음주 신풍속도이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30년째 돼지갈비집을 운영하는 이아무개씨(63ㆍ여)는 “손님들이 밖에서 술 마시기를 원해 테이블을 죄다 밖으로 빼냈다”며 텅빈 업소 홀을 손으로 가리켰다.
월드컵 열풍 탓에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 울상을 지었던 룸살롱 단란주점 등의 유흥업소와 미아리 등 윤락가도 다시 얼굴을 펴고 있다. 4강신화를 통해 퍼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술꾼들에게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해 ‘만용’를 부리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술집 행렬에 한몫하는 것이 바로 월드컵 기간에 내기를 걸었던 직장인들의 ‘당첨 사례’.
이 주점의 한 여자종업원은 “어제 단체 손님들이 왔는데, 직장에서 월드컵 경기 결과에 대한 내기를 해 가장 적중률이 높은 사람이 월드컵 결산 삼아 술을 사는 자리였다”고 소개했다. 직장내에서의 ‘월드컵 내기 열풍’이 대회 폐막 후 자연스럽게 ‘내기에서 이긴 자의 한턱 쏘기’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월드컵 폐막 세리머니를 삼아 거창하게 합동술자리를 갖는 직장인들도 등장하고 있다. 일부 술꾼들은 “거리 응원에서 봤던 젊은 여성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며 엉뚱하게도 여성 접대부가 있는 유흥업소로 힘차게 “고(Go)!”를 외치기도 했다.
월드컵 후유증은 곳곳에서 돌출되고 있다. 최근엔 쓸데없이 저녁 무렵 광화문과 시청 주위를 오락가락하는 ‘배회족’ 젊은이들까지 생겨났다. 물론 ‘그때 그 분위기’를 잊지 못해서다.
서울 종로1가의 PC방에서 만난 한 대학생 커플은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광화문 한복판 군중들 틈에서 키스를 할 수 있었겠느냐”며 “그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어 광화문까지 찾아갔는데, 결국 허탈한 마음에 갈 데가 없어 PC방으로 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월드컵 후 우리처럼 많은 연인들이 다시 컴컴한 비디오방이나 카페 구석으로 숨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다”고 씁쓸해했다.
TV 앞을 여전히 떠나지 못한 채 월드컵 향수에 묻혀 사는 사람들도 많다. 각 방송에서 계속해서 심야와 낮시간에 재경기를 보여주는 탓이다. 밤 2~3시까지 재경기를 보고 다음날 지각을 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월드컵 기간에는 분위기에 휩쓸려 지각도 어느 정도 용인되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져서 ‘향수파’ 직장인들이 하루종일 눈총을 받는 일도 잦아졌다.
지난 한달 간 월드컵 때문에 자주 일손을 놓는 바람에 뒤늦게 밀린 일을 하느라 한숨을 짓는 풍경도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다. 특히 중요한 시험을 앞둔 고시생과 고3 수험생들의 조급함은 더하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일과 학업에 집중하려 하지만, 월드컵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월드컵의 ‘빈자리’ 때문에 서둘러 여름휴가를 떠나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프리랜서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는 신아무개씨(26)는 “어차피 지금 일이 안될 바에야 휴가를 앞당겨 친구들과 여행이나 다녀오면서 완충기간을 갖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월드컵 증후군 탓에 비상이 걸린 기업들도 수두룩하다. 이들 기업들은 직원들의 월드컵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처방전을 내놓고 있다. 휴가 일정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가 하면, 단합대회나 MT 등의 이벤트 행사를 준비해 월드컵으로 일어난 신바람을 업무에 접목시키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상당수 여성들의 월드컵 후유증은 더욱 심각하다. ‘해트트릭’이 뭔지도 잘 모르다가 월드컵을 통해 축구의 묘미에 푹 빠진 이들 여성들은 월드컵 이후 갑자기 달라진 조용한 분위기에 적잖게 당황해하고 있다. 특히 집밖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가 다시 집에 혼자 남겨진 주부들의 ‘상실감’은 신경정신과 의사들조차 우려할 정도.
서울 구의동에 사는 주부 김정아씨(33)는 “거리에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소리 지르고 기뻐했는데, 다시 주방에서 혼자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서글퍼지는 느낌이 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20대 여성 네티즌 차아무개양은 인터넷에 “월드컵 이후엔 권력형 비리 얘기나 정쟁,…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세상사 얘기가 우리를 다시 짜증나게 하겠지?”라는 푸념조의 글을 올렸다. 어쩌면 월드컵 이후 다시 마주쳐야 할 우리를 슬프게 하는 광경들이 월드컵 후유증을 더 깊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