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2012년 <연가시>가 450만 관객을 기록한 데 이어 2013년 개봉한 영화 <감기>도 300만 관객을 넘기며 한국형 재난영화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입증시켰다. 1년 사이를 두고 개봉한 <연가시>와 <감기>는 전혀 다른 유형의 재난 영화지만 각각의 매력은 모두 영화팬들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감기>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연가시>를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흥행 성적에서 보듯 물론 평가는 <연가시>가 더 좋다. 재혁(김명민 분)이라는 평범한 회사원과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된 <연가시>는 치사율이 100%에 이르는 질병 앞에서 평범한 가족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결국 치료제 개발을 재혁이 해낸다는 부분에서 그를 재난 영화의 전형적인 히어로로 볼 수도 있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팍스아메리카 히어로와는 차이점이 크다. 한국형 평범한 히어로라는 점에서 더 관객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연가시>에서의 공적은 수익에 집중하는 기업과 기업가들이었다.
<감기> 역시 그 중심은 인해(수애 분)와 미르(박민하 분) 모녀, 그리고 그를 돕는 구조대원 지구(장혁 분)다. 우선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변형 조류독감’이라 기생충과의 접촉이 필요한 ‘변형 연가시’보다 재난성이 더 크다. 영화의 공적 역시 정치권과 미국 등으로 확대돼 있다. 이번 영화에서 미국의 역할은 영화 <괴물>에서와 흡사하다. 한미 전시작전권 문제 등 시사적인 문제까지 이야기의 규모를 확대한 부분도 눈길을 끈다. 게다가 인해는 평범한 엄마가 아닌 의사로 해당 조류 독감을 발견하고 치료 백신 연구의 최일선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 역시 <연가시>의 재혁과는 차이점이 크다.
다시 말해 <감기>는 한국형 재난 영화인 <연가시>에 비해 할리우드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만큼 스케일도 크다. 도시를 봉쇄하고 도시 하나를 희생해 나머지 국가, 아니 전세계를 구하려는 총리와 미국 주도의 ‘클린 시티’ 대책과 봉쇄된 도시의 인권을 우선하는 대통령의 대립은 이미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본 구도다.
그나마 <감기>는 미르의 비중을 늘려 영화가 수애 중심의 할리우드적인 재난영화가 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장치를 했다. 수애와 장혁의 연기력은 이미 충분히 검증된 사안이지만 <감기>의 진정한 주연 배우는 미르다. 미르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내며 그 배역을 맡은 박민하는 영화 데뷔작임에도 빼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몇 편의 드라마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지만 SBS 박찬민 아나운서의 딸로 더 유명했던 박민하는 탄탄한 연기력으로 영화팬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잘 성장한다면 박찬민의 호칭이 유명 아나운서에서 ‘명배우 박민하의 아버지’로 바뀔 수도 있을 분위기다.
장혁과 박민하를 중심으로 치명적인 유행병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얘기가 그려지고 차인표를 중심으로 한 대재난 상황에 임하는 정치권의 모습, 그리고 그 중간자 역할인 수애의 모습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감기>는 할리우드 재난 영화를 무난하게 한국화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분명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한국 영화다.
다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우선 <감기>는 <연가시>에 비해 더 무서운 전염병을 소재로 했지만 비주얼은 부족했다. 변형 조류독감 환자로 넘쳐나는 병원, 시민 보호소와 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체 등의 비주얼이 등장했지만 스스로 물에 뛰어 들어 사망하는 시민들, 강과 계곡을 가득 메운 시체들이 등장하는 <연가시>의 이미지가 훨씬 더 무시무시한 재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전투기가 날아들고 시민들과 군인의 대치 장면 등 스케일이 큰 이미지도 자주 등장하나 재난 영화의 특성상 <연가시>의 강과 계곡에 떠 있는 시체들의 이미지가 훨씬 더 충격적이다.
재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해당 재난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그래야 관객들이 더 무섭게 재난 영화에 빠져든다. 주인공이라고 이를 피해간다면 몰입하기 힘들다. 영화에서 문제의 변형 조류독감은 감염에서 사망까지의 시간이 너무 짧아 타미플루 등 기존 치료제를 사용해 볼 여유조차 없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주인공인 미르는 이 법칙에서 벗어나 있다. 물론 인해가 미르에게 항체를 갖고 있는 외국인의 혈청을 주입해서 그렇지만 그 이전까지의 긴 시간도 이해가 쉽지 않다. 국내에 해당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가져온 외국인을 직접 만나서 감염됐지만 발병 사실을 엄마인 인해가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무시무시한 전염성이 유독 미르에게만 적용되지 않은 셈이다. 이런 부분은 재난 영화에서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는 데 커다란 허점이 될 수 있다.
이야기의 틀을 너무 키운 것도 문제다. 젊은 대통령이 경륜 있는 총리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한미 작전통제권을 내세워 대통령을 압박하는 미국 측의 모습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재난 상황 자체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부분은 아쉬움을 남긴다.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금세 평온을 되찾는다는 설정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재난 영화의 결말은 대부분 재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이야기를 키우다 보니 재난이 다 극복돼 영화가 끝난 뒤에도 뭔가 찜찜함이 남는다.
그럼에도 <감기>는 분명 재미있는 영화다. 300만 관객을 동원했음이 이를 입증하며 적어도 기자는 재미있게 봤다. 비난의 소지가 있고 허점도 다소 엿보이는 등 아쉬움도 분명 있지만 재미라는 측면에만 볼 때 충분히 즐길 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