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악 선생의 최근 모습. | ||
판소리의 대가 유성준 임방울 선생에서부터 최근 작고한 명창 박동진옹에 이르기까지 그와 인연을 맺지 않은 국악계 거목은 거의 없을 정도다.
그는 “유성준 선생은 참 성질이 급하셨어. 내가 아홉 살 땐가, 그때 그 선생님이 일흔의 나이셨는데. 그때 나랑 같이 배운 두 분은 당시에도 이름 석자만 대면 다 알 만한 임방울 선생과 신숙 선생이셨지. 우리 셋을 앞에 앉혀놓고 선생님은 자신이 한 선창을 제때에 받아치지 못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져.
‘임방울, 신숙, 이 잡것들. 에라이 이것들아 이름이 아깝다. 어찌 얘만도 못하냐. 너희들 저리 가고 순녀 네가 가운데 앉아!’라고 말야. 임방울씨는 남자라 그런지 어린 나를 그냥 대견해하고 귀여워했지만, 신숙씨는 은근히 샘을 내더라고.”
김 선생은 경남 함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국악을 좋아한 부친과 숙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았다. 어린 김순녀는 8세에 진주권번에 입적한 후 여기서 시조 한문 일본어 춤 소리 기악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래 중에 단연 돋보였던 딸의 재능을 높이 산 부친은 따로 유명한 독선생을 초빙하여 가르치기에 이른다.
당시 그는 진주권번의 일인자였던 최완자 선생에게 진주검무와 교방굿거리춤을 사사한 것을 비롯, 강귀례 김녹주 한성준 유성준 선생 등 당대 제일의 고수들에게 춤과 판소리, 기악 등을 사사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김 선생의 눈가엔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 “다른 잇속 챙길 줄 모르고 그저 소리와 춤이 좋아서 거기에만 온 정열을 바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나 한 평생은 후회없이 지내왔지만 자식들에게 참으로 미안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참 속상한 것은, 당시엔 ‘감히 저것들도 소위 예술한다는 작자들이냐’ 싶었던 자들은 지금 집도 몇 채씩 사고 행색을 하니 밑에 사람들도 따르고 하는데, 오히려 예술에만 온 정신을 쏟고 제자들 아끼고 가르친다고 있던 집도 팔고 하던 사람들은 지금 와선 남은 것 하나 없고. 가진 게 없다보니 남들이 깔보고, 이러다간 앞으로 인간문화재니 명인이니 하는 것도 다 돈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가 싶어. 큰일이야.”
며칠 전에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보일러를 손보기 위해 온 몇몇이 “명인을 이렇게 처박아 놓다니” 하며 자기들끼리 혀를 끌끌차며 가더라고 했다. 우연히 자기들끼리 한 말을 듣고 김 선생은 슬프기보다는 참으로 창피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최근 근황을 얘기하던 중 김 선생은 요즘 겪고 있는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한 제자로 인한 마음고생과 함께 행정당국에 대한 아쉬움 등이었다.
“보유자가 살아 있을 때 어떻게 하든 그 기능을 하나라도 더 전수받을 생각을 해야지. 그래야 우리 전통무가 이어져 내려갈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없어지면 제가 자연히 그 일인자가 될 것이라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자가 있어. 마치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야.”
그는 요즘 국악계의 세태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다.
“나한테 한 두세 달 배우고 나가서는 밖에서 이 김수악의 수제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모양인데, 그렇게 해서 설사 인간문화재를 받으면 뭐할 것인가. 문화재라 하면 그만한 인고와 열정이 뒤따라야 가치가 있는 법이지. 명예만 따서 사기치려고 덤벼들면 이 나라 바보 만드는 것이야. 전통문화가 죽어버린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
그는 행정당국에 대한 불만도 표시했다. “공무원들도 막상 명인들은 뒷방 늙은이 취급하고 밖에서 로비나 많이 하는 그런 자들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며 굽신 거려. 얼마 전 진주 시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인사나 하려고 했는데, 세 번 네 번 찾아 가도 만나 주지를 않더만.”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