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이젠 아빠가 곁에 있어줄게’
이창근 씨의 유해는 안양시립청계공원묘지 내 혜진 양의 묘 인근에 안장됐다. 가운뎃줄 맨 왼쪽이 이창근 씨, 맨 오른쪽이 혜진 양의 묘.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 이 씨는 애타게 딸을 찾아다녔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 씨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 어디야? 아빠 뭐해?”라고 묻는 애교 많은 막내 딸 혜진 양을 유난히 아끼던 이 씨였다. 혜진 양이 실종된 안양시내 곳곳에는 관공서와 사회단체에서 내건 혜진이 예슬이 찾기 현수막이 나붙었다. 안양역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전단지가 배포됐고, 아이들이 돌아오길 염원하는 노란리본 운동이 곳곳에 이어졌다. 그러나 이 씨의 간절한 바람에도 혜진 양은 실종 77일째 되던 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이 씨의 시간은 그날로 멈춰버렸다. 이 씨는 10년간 일했던 인쇄공장도 그만둔 채 술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몸을 혹사시킨 이 씨의 허리사이즈는 24인치까지 줄었고, 균형을 잃고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는 바람에 성한 이가 다 부서지기도 했다. 주변의 권유로 상담센터에서 치료도 받았지만 이 씨의 상처는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이 15kg 넘게 빠졌다. 딸 무덤 앞에 가면 엉엉 울기만 하니까….”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전미찾모) 나주봉 회장(57)은 황망한 얼굴이었다. 매년 12월 24일이면 이 씨와 함께 혜진 양의 추모제를 지내기 위해 청계공원묘지에 올랐던 나 회장은 지난해 추모제가 마지막 추모제가 될 것을 가늠했다. 무엇보다 혜진 양의 아버지가 지쳐있었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혜진예슬이 사건’이 점점 잊히면서 추모객의 발길도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씨가 삶에 대한 의지를 완전히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나 회장은 “오히려 살려는 의지가 강했다. 겨울이면 전미찾모에서 진행하는 독거노인 연탄나르기 봉사에도 참여했고, 전국의 전미찾모 가족들을 위로하기도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씨의 생전 사진을 찾아보던 나 회장은 지난해 추모제 때 이 씨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며 “딸이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했다. 결국 몸이 술을 견디지 못하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꽃샘추위가 매섭던 지난 5일 오후, 화장된 이 씨의 유해는 이 씨가 하루도 잊어본 적 없다는 혜진 양 옆자리에 안장됐다. 혜진 양의 오빠(24)와 언니(22)가 눈물을 훔치며 고인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문 이 씨의 부인 이달순 씨(49)는 혜진 양이 잠들어 있는 묘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하늘나라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지난 연말 딸의 추모제에 참석한 혜진 양의 아버지 이창근 씨. 사진제공=전미찾모
남편이 혜진 양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사이 생계는 고스란히 부인 이 씨의 몫이었다. 부인 이 씨는 식당일을 하며 남은 가족의 생활을 책임졌다. 이 씨가 술을 마시면서부터 부인 이 씨의 잔소리가 늘긴 했지만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을 만큼 금술이 좋은 부부였다.
“숟가락 하나 없이 시작해 26년을 같이 살았다. 남편이 버는 돈은 저축하고 내가 버는 돈은 생활비로 쓰면서 집까지 장만했다. 집하고 공장밖에 몰랐다. 그 정도로 성실했던 사람이었다.”
부인 이 씨는 남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난 일요일에 깍두기를 담그는 데 쪽파를 다듬어 주더라. 투박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었다. 그날까지만 해도 말도 잘하고 했는데…”라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부인 이 씨는 “집이 엉망이다. 집 정리를 좀 해야겠다”며 악수를 건넨 후 조용히 집으로 들어갔다.
딸이 살해당한 뒤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다 결국 죽음에 이른 이 씨의 사연이 보도되면서 범죄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을 지원하는 제도가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기구는 대부분이 정부가 민간에 위탁을 주는 형식이고, 예산도 2009년 116억에서 이듬해 111억 원으로 또 그 다음 해 99억 원으로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형민 연구원은 “범죄 피해자나 범죄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이 법률적인 자문에 그치는 정도”라며 “법무부가 몇 해 전 설립한 ‘스마일센터’가 범죄피해자의 심리치료를 지원하고 있지만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홍보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스마일센터’ 같은 기관이 혜진 양 아버지와 같은 범죄피해자를 염려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번 같은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혜진예슬 양을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정성현은 200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서 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