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한 중산층의 변신 “나는야 ‘흙’에 살리라”
도쿄에서 시골로 내려와 결혼생활을 하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노란 코끼리>의 한 장면.
소위 잘나가는 일본의 초부유층 나카지마 씨(가명·46)는 3년 전,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싱가포르를 선택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작용했으나 역시 ‘상속세가 없다’라는 점이 가장 컸다. 그는 “고령화 시대, 일본에 남아 있으면 엄청난 세금을 내게 될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라면서 “제대로 된 성장전략도 못 세우는 나라에 남아 재산을 축내느니 해외에서 사는 것이 낫다”는 속내를 밝혔다.
실제로 나카지마 씨처럼 생각하는 일본의 부유층은 적지 않다. 최근에는 대형건설회사 다이토켄타쿠, 광학기기업체 호야 등의 일가가 자산을 싱가포르에 옮긴 것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부유층의 싱가포르 이주를 돕고 있는 한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과거 일본의 부자들은 높은 상속세에 시달려도 자신이 성공한 것은 조국 덕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쇠락이 눈에 보이는 가운데 싱가포르처럼 매력적인 조세회피 지역이 존재하는 이상 그들이 일본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사실 이러한 부유층의 특권계층화는 세계적인 추세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에서도 등장한 것이다. <주간겐다이>는 이들을 ‘슈퍼엘리트’ 계급이라 칭하며 “가진 자는 나라를 빠져나가 세금도 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럼, 슈퍼엘리트에는 미치지 못해도 소득이 월등히 높은 ‘엘리트’ 계층은 어떠할까. 미국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에 의하면 “미국 엘리트들의 대부분은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 4개의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더 간단하다. 그들은 도쿄에 산다.
외국계 증권회사에 다니는 하루키 씨(가명·34)는 아내도 증권계에서 일하는 맞벌이 부부다. 둘 사이에 아이는 아직 없으며, 연간수입은 3000만 엔(약 3억 2000만 원)이 넘는다. 사는 곳은 도쿄 시내 고급아파트. 철통같은 보안에 고급슈퍼마켓, 음식점, 병원, 피트니스클럽 등이 완비되어 있는 곳이다.
겉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한 환경이다. 하지만 정작 하루키 씨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주위에 개인제트기나 호화요트까지 소유한 친구들이 많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엘리트와 달리 작은 일상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시마네 현에 사는 유스케 씨(가명·30)는 중학교 동창생과 결혼해 고향에서 살고 있다. 월급은 우리 돈으로 200만 원 정도. 도쿄의 신입사원이 받는 금액보다도 한참 적지만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거의 없다. 아이는 공립학교에 보내면 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는 것. 유스케 씨는 “전체적으로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야근은 적당히, 돈보다는 가족들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주간겐다이>는 유스케 씨와 같이 지방에 살며, 격차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을 ‘신양키족’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신양키라 불리는 일본의 신인류가 폭발적으로 증가 중”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소득은 낮아도 소비에 관심이 많아 계속 고향에 살면서 돈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잡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옛날엔 열심히 일하면 상류층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고, 실제로 벼락출세 경로가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의 일본은 역전의 기회가 사려졌기 때문에 고향에서 여유롭게 지내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1980년대 말 일본은 “전 국민이 중산층이라는 ‘1억 총 중류사회’가 됐다”고 자랑했었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국민도 80%를 넘어섰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잃어버린 20년’ 장기불황 속에서 일본은 격차사회로 곤두박질쳤고, 경제적인 이유로 점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늘어나게 됐다. 이러한 배경 탓에 신양키족은 도쿄를 싫어하며 지역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하다.
다행인 것은 구미와 달리 지금까지 일본은 문화적인 면에서 노골적인 계급격차가 드러나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근의 신양키족과 엘리트를 살펴보면, 뚜렷한 가치관 차이를 나타낸다. 양자의 차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생각이다.
가령 신양키족은 고향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현지 공장이나 가게에 취직한다. 빠르면 20세 안팎으로 혼전임신을 해 결혼하기도 한다. 또 대부분은 아이들을 여럿 낳는다. 도쿄의 엘리트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만혼, 늦둥이는 이들에겐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이에 반해 도쿄의 엘리트들은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아도 한 명 정도에 불과하다.
선호하는 물건도 다르다. 도쿄에서는 팔리지 않는데, 지방에서는 불티나게 팔리는 것들이 있다. 아이돌의 히트곡이나 인터넷소설 등이 그것이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있다. 건강에 신경을 쓰는 부유층은 야채도시락을 선호하지만, 지방 편의점에서는 오히려 튀김도시락이 인기다.
일각에서는 “엘리트와 양키의 계급격차가 어떤 의미로는 국가 정책이 아니냐”는 지적도 흘러나온다. 고베여학원대학의 명예교수 우치다 다쓰루는 “특히 일본재계가 강한 계층분화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일본의 제조업은 해외로 생산거점을 옮긴 지 오래지만, 이전처의 경제성장과 함께 인건비가 크게 올라 수익이 떨어지고 있는 상태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이 통하는 자국에서 제조하는 것. 그러나 역시 비싼 인건비가 걸림돌이다. 때문에 일본 정관재계는 ‘미숙련 저임금 비정규직’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급원이 되는 것이 신양키족이라는 설명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더욱 더 풍요로운 삶을 원하는 도쿄의 엘리트와 적당한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는 신양키족. 결코 넘어설 수 있는 가치관의 벽이 일본을 나누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강윤화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잠깐 - ‘신양키족’이란 폭주족 같은 사회 불만 세력을 ‘양키족’이라 칭한 데서 유래해 최근에는 엘리트의 반대 집단을 ‘신양키족’이라고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