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스릴러의 만남이 돋보이는 영화 <그랜드 피아노>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주인공이 더욱 절박한 위기에 내몰리는 스토리를 통해 스릴러를 만들어 간다. 2013년에 개봉된 스페인 영화로 원제는 <Grand Piano>, 러닝 타임은 90분이다. 46회 시체스국제영화제(2013) 개막작이며 18회 부산국제영화제(2013) ‘미드나잇 패션’ 부문 초청작이기도 하다.
주인공 톰 셀즈닉(일라이저 우드 분)은 5년 전 공연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뒤 공연계를 떠난 천재 피아니스트다. 그에게 치명적인 실수로 트라우마를 안긴 곡은 완벽한 연주가 불가능한 곡으로 알려졌을 만큼 빠른 손과 완벽한 기교가 절실한 피아노 연주곡인 ‘라 신케트(라 싱켓)’다. 라 신케트를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단 둘뿐. 그중 한 명이 톰이며 또 한 명은 톰의 스승이다. 톰의 스승이 사망하면서 이젠 톰이 유일하게 라 신케트를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로 남았지만, 그 역시 5년 전 공연에서 실수를 한 바 있다.
톰은 세상을 떠난 스승을 기념하는 무대이자 그가 사용하던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마지막 공연이기에 5년 만에 공연 무대에 선다. 연예인으로 성공해 스타덤에 오른 아내 엠마 셀즈닉(케리 비쉐 분)의 응원도 톰이 다시 무대에 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톰은 여전히 무대가 무섭다. 다행히 그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라 신케트는 연주 프로그램에서 빠졌다.
그렇게 무대에 오르려 하는데 누군가 악보를 전달하고 여기엔 라 신케트 악보도 포함돼 있다. 톰은 누군가의 장난이라 여기며 분노와 함께 라 신케트 악보를 구겨서 버린다. 하지만 연주를 시작한 톰은 악보에 적힌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란다. 누군가가 소음기를 단 저격총으로 톰을 위협하고 있는 것. 협박범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톰은 물론이고 그의 아내 엠마까지 살해하겠다고 위협한다. 협박범이 준비해 놓은 무선 헤드셋마이크를 귀에 꼽고 협박범과 대화를 나누며 연주회를 이어가는 톰의 모습은 스릴러 본연의 날카로운 긴장감을 선사한다.
협박범의 최종 메시지는 바로 라 신케트를 완벽하게 연주하라는 것이다. 연주 프로그램에도 없는 곡이지만 협박범은 톰에게 오늘 이 무대에서 죽은 스승의 그랜드 피아노로 라 신케트를 완벽하게 연주하라고 압박한다. 그렇지 않아도 라 신케트로 인해 트라우마를 안고 무대에 오른 톰은 이제 아내의 목숨까지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서 라 신케트를 완벽하게 연주해야 한다.
영화는 톰이라는 유명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공연 준비 과정부터 시작해 연주회의 시작부터 끝까지가 이 영화의 주된 무대다. 따라서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할 수 있다는 부분에선 클래식 영화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뤄지는 협박범의 위협은 스릴러의 요소를 추가한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프로도로 유명한 일라이저 우드의 연기다. 트라우마로 무대를 겁내는 연기부터 협박범의 협박에 당황하는 연기 등은 기본, 어려운 피아노 연주 장면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 신케트는 실존하는 곡은 아니다. 아무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제작진이 만들어낸 피아노곡으로 상당한 기교가 필요한 곡이다. 그리고 일라이저 우드는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조엘 슈마허 감독의 명작 <폰부스>를 닮아 있다. 우연히 벨이 울리는 공중전화를 받았다가 폰부스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협박범에게 협박을 당하는 한 남성의 절박한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의 명작 <폰부스>와 상당 부분 닮은 구석이 많은 것. 다시 말해 <폰부스>의 배경인 공중전화 박스를 피아노 연주회로 옮겨온 영화다.
그렇지만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 협박의 실체는 다소 허망하다. 라 신케트라는 곡이 그랜드 피아노에 숨겨진 비밀에 다가갈 수 있는 비밀번호 역할을 한다는 뻔한 설정부터 영화 후반부 허망하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 뒤 톰과 육박전을 벌이는 협박범 클렘(존 쿠삭 분)은 영화의 긴장감을 터무니없이 무너트린다. 영화 시작과 함께 조성된 긴장감은 톰의 라 신케트 연주 시작 시점까지 고조되지만 그 이후 갑작스럽게 허물어진다. 게다가 결말 부분에선 완벽해 보이는 협박범 클렘이 허술한 잡범이 돼 톰과 육박전을 벌이는 장면과 엉뚱하게 객석에서 노래를 부르는 엠마의 장면을 교차 편집한 부분은 황당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또한 협박범이 왜 하필 5년 만의 복귀 무대에서 톰에게 라 신케트를 연주하게 시켰는지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심지어 협박범 클렘의 공범까지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냐”고 따질 정도인데, 기자는 공범의 말에 더 공감이 간다. 톰에게 비밀의 그랜드 피아노로 라 신케트를 완벽하게 연주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트라우마로 긴장한 공연 무대가 아닌 다른 공간에서 시키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터이니 말이다. 결국 협박범의 복잡한 협박은 결국 범죄의 성공보다는 더 그럴싸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의도로 밖에 안 보인다. 클래식 연주회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는 그럴싸한 영화적 요소를 위해 완벽한 범죄를 포기한 협박범이니 애초부터 실패가 불가피한 범죄를 계획한 게 아닐까.
그리고 결말에서 톰이 그랜드 피아노의 비밀을 파악하는 장면에선 하품 섞인 실소가 나올 정도다. 말 그래도 용두사미인 영화랄까. 스릴러 명작 <폰부스>에 클래식을 더해 더욱 품격 있고 긴장감 넘치는 영화로 시작했지만 킬링타임용 B급 영화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 배틀M이 추천 ‘초이스 기준’ : 클래식을 좋아하는 영화팬으로 스릴러까지 보고 싶다면 클릭
평소 클래식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볼 만한 영화다. 한 편의 피아노 연주회를 보면서 스릴러적인 요소까지 보너스로 즐긴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스릴러를 전면에 내세웠음을 감안하면 분명 이 영화는 스릴러 영화를 즐기면서 보너스로 클래식 요소까지 즐기도록 설계돼 있다. 그런데 이런 의도에 따라 스릴러 영화를 즐기고자 접근한다면 허술한 스릴러에 실망하고 지루한 클래식 공연에 하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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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영화와 스릴러 영화의 요소를 결합한 이 영화는 두 가지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지만 시너지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초반부터 중반까지 이어지는 긴장감은 팽팽하지만 중후반부 이후 급격히 긴장감이 무너지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만 큰 기대감 없이 본다면 그냥저냥 즐길 수 있는 영화로는 무난하다. 스릴러 영화로써 다소 아쉬운 부분은 일라이저 우드의 멋진 피아노 연주를 보는 것으로 어느 정도 상쇄된다. 다만 피아노 연주회 등 클래식은 지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겐 오히려 스릴러의 빈틈이 지루하게 채워진 셈이니 ‘비추’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