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철 | ||
연쇄살인 피의자 유영철이 평소 차고 다니던 ‘스와치’ 시계가 유씨 행적의 ‘블랙박스’로 주목받고 있다. 유영철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는 유씨의 시계가 교통카드 겸용이란 것에 주목, 내장된 칩에 숨겨진 이동정보를 조사하고 있다.
유씨의 범행 중 상당 부분이 자백에 의존한 것이라 그의 그간 행적을 추적함으로써 진술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고 추가 범행에 대한 단서를 찾으려는 것이다.
이 같은 ‘역추적’이 가능한 것은 버스나 지하철의 단말기에 스와치 시계 를 접촉할 때마다 시계 속 교통카드 칩에 내장된 고유번호가 단말기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카드의 고유번호만 알면 카드를 사용한 사람의 버스와 지하철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는 셈이다.
<일요신문>은 유씨의 시계 속 교통카드 칩이 사용된 지난 5개월간의 내역서를 최근 단독 입수했다. 이 내역서에는 주로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온 유영철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사건 발생 일시·장소 등 유씨 진술의 진위를 파악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간 수사과정에서 간과됐던 숨은 사실들을 유추해내는 귀중한 단서 역할도 할 것으로 평가된다.
이 내역서에 따르면 유씨는 연쇄살인 사건과는 관련 없는 지역인 서울 신당·당산 등 특정 지역에 자주 출몰한 것으로 나타나 그 배경이 주목된다. 또한 가장 최근인 7월에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 중 2건은 다른 경우와 달리 유씨가 하루종일 집에서 바깥 출입을 삼가다가 저지른 것으로 나타나 그의 범죄심리 변화상을 연구하는 데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연 평소 유씨는 어떤 행적을 보였을까. 그의 시계 기록 속에 감춰진 ‘진실의 시침’을 하나씩 뒤따라가 봤다.
검찰이 조사중인 유영철의 교통카드(칩) 번호는 총 2개다. 유씨가 3월25일 구입한 시계와 5월26일 기계 이상을 이유로 교환받은 시계 속 칩의 고유번호다. 일부 언론에는 유씨가 지난해 9월24일 스와치 시계를 구입한 후 네 차례 교환해 간 것으로 보도됐지만 검찰이 확보한 시계는 2개로 지난 3월25일 이후의 사용 내역만이 나와 있다.
그 이전에 유씨가 사용한 교통카드가 혹시 있지 않을까. 그러나 유씨는 검찰에서 ‘모른다’고만 얘기하고 있어 검찰은 자체적으로 또 다른 교통카드가 없는지 추적을 하고 있다.
<일요신문>이 입수한 유씨의 시계 속 교통카드 사용 내역서(A4용지 네 장 분량) 역시 지난 3월25일 이후 기록을 담고 있다.
이 내역서에는 지하철의 경우 승차역과 승차한 시각, 하차한 역과 하차한 시각이 상세히 적혀 있다. 그러나 버스의 경우에는 버스 승차시 카드를 사용한 시간만 표시될 뿐 승차한 장소와 하차한 장소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아 유씨의 행적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지하철 이용 전후에 버스를 탄 내역을 서로 조합해 보면 어느 정도 이동 경로에 대한 유추가 가능하다.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
먼저 확인할 부분은 과연 유영철이 자백한 범행 일시와 장소 등이 교통카드 사용내역과 얼마나 일치할까 하는 점이다. 내역서를 보면 유씨의 진술이 그의 기록으로 남은 행적과 어느 정도는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지난 7월1일의 범행. 경찰 조사에서 유씨는 피해자 김아무개씨(여·25)를 역삼동 6번 출구로 부른 뒤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내역서에 따르면 유씨는 이날 오후 7시57분에 신촌에서 지하철을 탄 뒤 9시11분에 태평역에 내렸다. 그후 한 시간 뒤인 오후 10시15분에 태평역에서 지하철을 탄 뒤 10시44분에 역삼역에서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피해자 김씨를 밤에 역삼역으로 불러냈다는 그의 진술과 일치하는 셈이다.
반면 7월9일과 13일, 두 건의 연쇄살인이 벌어진 날짜에는 유영철이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동한 기록이 없다. 유씨는 경찰 조사에서 신촌 등 자신의 집 근처로 피해여성을 불러냈다고 진술했는데, 이 역시도 내역서 기록과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은 처음에는 자신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를 고르지만 범행을 거듭할수록 대담해져 점점 자신의 주변에서 범행 대상을 찾는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유씨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 유영철의 ‘범행동선’을 확인할 수 있는 교통카드 사용 내역을 <일요신문>이 단독입수했다. 시계는 교통카드 겸용으로 유영철의 것과 동일한 모델. | ||
한편 유영철이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범행날짜를 내역서 기록을 통해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유씨는 ‘6월 중순 어느 날’ 서울 불광역 인근의 한 여관에서 우아무개씨(여·28)를 만난 뒤 집으로 유인해 살인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6월 중순을 전후로 내역서 기록을 살펴보면 유씨가 인근 지역에서 하차한 것은 단 한 차례뿐. 6월22일 지하철을 타고 저녁 7시에 녹번역에서 내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녹번역과 불광역은 불과 한 정거장 차이인 만큼 유씨가 범행을 저지른 날일 가능성도 커 보인다. 검찰이 이를 유씨에게 확인해 본다면 정확한 범행일시가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동행자들은 누구일까
경찰 수사에서 유영철은 주변에 아는 사람 없이 거의 혼자서 지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내역서에는 유씨가 다른 사람의 버스요금을 내어준 흔적이 여러번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로 그가 5월12일 오후 7시8분에 탄 G마을버스에는 자신의 시계 카드로 세 명의 요금을 낸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마을버스 회사는 신촌과 공덕동을 오가는 노선버스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씨가 공덕동의 어머니 집에 갔다가 가족과 어디론가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만약 유씨가 가족과 함께 이 버스를 이용한 것이라면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씨는 평소 어머니 등 일부 가족과도 자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내역서 기록에 따르면 네 번이나 유씨의 동행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공항버스를 이용한 6월12일에는 세 명이 함께 탄 뒤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올 때 유씨가 네 명의 요금을 낸 기록이 남아 있다. 누군가를 마중하러 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가족들인지 아니면 베일 속의 주변 인물들인지는 유씨의 입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특정 장소 가주 간 까닭
유영철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음에도 내역서 기록상으로 일정하게 자주 들렀던 장소가 발견돼 그 배경이 궁금해진다. 혹시 또 다른 범죄의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닐까.
유씨가 자주 갔던 지역은 지하철 신당역과 당산역으로 그가 저지른 연쇄살인사건들과는 거의 무관한 장소다. 유씨가 신당역에 갔던 것으로 확인되는 날짜는 4월13일, 4월14일, 4월22일, 5월10일, 5월28일, 6월22일 등이다. 행선지가 나타나지 않는 버스를 이용한 것까지 합하면 꽤 자주 이곳에 들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산역에 간 것도 3월27일을 비롯해 여러 차례다.
유씨가 혹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사는 전처 또는 예전 동거녀를 만나러 간 것은 아닐까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여동생은 공덕동, 전처는 목동, 동거녀는 신림동에 살고 있었다. 유씨가 왜 신당동과 당산동 일대를 자주 들른 것인지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자백과 어긋나는 부분
교통카드 내역서 기록에선 유씨가 경찰에서 자백한 범행 일시 등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발견된다.
유씨는 지난 4월14일 서울 황학동의 노점상을 살해하고 인천 월미도에서 시체를 방화했다고 진술했다. 자백 내용에 따르면 유씨가 노점상 안아무개씨(44)를 만나 경찰을 사칭하며 수갑을 채운 것은 이날 밤 10시. 그후 유씨는 안씨를 안씨 소유의 승합차에 태워 신촌의 한 노상주차장에서 살해한 뒤 이 차를 몰고 인천으로 가서 차를 불태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일 내역서에 나타난 유씨의 행적을 보면 오후 4시28분 신촌에서 지하철로 신당으로 이동한 뒤 2시간 후인 6시28분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거주지역인 신촌으로 되돌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유씨가 다시 움직인 것은 이날 밤 10시34분. 이번에는 신촌에서 충정로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이날 유씨가 버스를 이용한 내역은 없다. 내역서 이동기록대로라면 유씨가 노점상 안씨에게 수갑을 채웠다는 시간에는 신촌 집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안씨의 승합차로 이동하고 있었을 시간인 오후 10시30분쯤에는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오히려 내역서 기록에 따르면 유씨가 피해자 안씨를 만난 것은 그가 도보로 신당역에서 동대문운동장역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이는 당일 오후 4시47분부터 오후 6시28분 사이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유씨의 자백에 의존해 기록한 범행일시를 다시 확인해 ‘재구성’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유씨의 행적에서 특이한 면모들을 찾을 수 있다. 4월2일에는 오후 10시58분에 신촌에서 지하철을 탔다가 1분 만에 다시 나오기도 했다. 19분 후 다시 같은 역에서 지하철을 탄 유씨는 1시간10분이 지나 수서에서 내렸다. 아마도 지하철역에 들어선 뒤 뭔가 잊은 것을 떠올리고 급히 집으로 되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4월 초는 유씨의 연쇄살인이 주춤하던 시기인데 과연 그의 발걸음을 되돌릴 만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진다.
한편 유영철은 3월27일에는 오전 11시26분부터 오후 7시33분까지 8시간 동안 버스를 7회, 지하철을 3회 이용하며 ‘왕성하게’ 움직이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겼다. 유씨는 왜 이렇게 바삐 돌아다녀야 했던 걸까. 혹시 범죄와 관련된 행적은 아니었을까. 이처럼 유영철의 ‘블랙박스’로 불리는 교통카드 내역서에는 아직도 풀어야 할 의문점이 숱하게 남아 있다.
검찰은 유영철이 재판에서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증거 확보 위주의 수사를 진행중이다. 과연 유씨 시계가 가지고 있는 사실적인 기록에서 얼마나 많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