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축구 ‘자책골’ 상대팀만 ‘때땡큐’
붉은악마도 탄식 2014 브라질 월드컵 H조 조별예선 3차전 대한민국과 벨기에의 경기가 열린 2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 한국은 이날 경기에서 벨기에에게 0-1로 져 1무 2패로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 홍명보·박주영의 동반 몰락
시한부 감독이었던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전북현대 감독)이 축구대표팀을 8회 연속 브라질월드컵 본선에 올려놓고 물러났을 때 축구인들의 시선은 홍명보에게 쏠렸다. 다른 후보 감독군들이 하마평에 오르내렸지만, 축구협회에선 기성용의 SNS 사건, 대표팀 불화설, 해외파 국내파의 갈등 등 다양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 대표팀 선수들을 제대로 아우를 수 있는 감독은 ‘형님 리더십’을 표방하는 홍명보 감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축협 고위 인사는 당시 러시아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지도자 수업을 마치고 미국 LA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는 홍 감독을 찾았고, 그를 설득했다. 홍 감독은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였다.
홍 감독의 대표팀 취임 일성은 거창했다. 홍명보호의 정신으로 ‘원팀(One Team)-원스피릿(One Spirit)-원골(One Goal)’을 명시하며 대표팀에 뽑히는 선수들이 이 정신에 부합되길 바랐다. 그러나 홍명보호의 정신은 정작 홍 감독 스스로 무너뜨렸다.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선수 선발로 인해 스스로 감독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중심은 박주영에서 출발했다. 홍 감독은 박주영을 선발하면서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한 선수를 뽑는다’는 원칙을 저버렸다. 거의 2년여간 소속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경기에도 나서지 못했던 박주영은 브라질월드컵 기간 동안 원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존재감 없는 플레이로 일관했다. 하지만 홍 감독은 그런 박주영을 끝까지 감싸 안았다. 3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는 교체 선수로도 내보내지 않았지만, 박주영에게 쏠린 비난 여론을 의식한 홍 감독의 배려라는 의견도 대두됐을 정도였다.
홍 감독의 이런 태도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축구 지도자 A 씨는 다음과 같이 쓴소리를 전했다.
“홍 감독이 런던올림픽 출전 선수들 위주로 월드컵대표팀을 구성한 것부터 잘못된 출발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면서까지 박주영을 데리고 간 건 홍 감독 스스로 늪에 빠진 거나 다름없다.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가 자신의 소신과 신념을 강하게 밀어 붙여야 하는 위치이지만, 홍 감독은 고집스럽게도 박주영 카드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4년을 기다린 월드컵 무대에서 홍 감독과 박주영은 함께 추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용이 벨기에 공격수의 드리블을 막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아쉽고 답답했던 베스트 11
러시아, 알제리전과는 달리 벨기에전에서 홍 감독은 이전과 다른 선발 라인업을 내세웠다. 브라질월드컵에 처음으로 선발 출전하는 김신욱과 골키퍼 김승규가 눈에 띄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두 선수가 벨기에전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
축구계에선 홍 감독이 선호하는 베스트 11에 포함된 선수들 면면을 놓고 ‘의리 축구’, ‘코드 인사’ 등으로 폄하한다. 러시아전을 1-1 무승부로 마무리한 후 알제리전에서도 러시아전과 변함없는 베스트 11을 내세운 홍 감독에게 여론의 집중 포화가 쏟아진 데에는 이런 홍 감독의 선수 구성에 대한 불만이 내포됐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월드컵을 경험한 이을용의 얘기를 들어본다.
“만약 알제리전에 벨기에전에서 뛴 베스트 11을 내보냈더라면 상황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봤다. 상대 수비수들을 교란시키는 장신 김신욱의 제공권 장악과 넓은 공격 범위, 수비를 오르내리는 강철 체력 등 김신욱의 장점을 극대화했더라면 알제리전에서 2-4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김신욱-이근호 카드를 좀 더 일찍 빼들었더라면 우리한테 득점의 기회가 더 많이 찾아왔을 것이다. 홍 감독으로선 중요한 경기에 평소 안 쓰던 카드를 베스트 11에 포함시키기가 어려웠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올림픽 멤버들에게만 향했던 시선이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 됐다.”
# 5실점 정성룡과 1실점 김승규
홍명보 감독이 27일 열린 한국 대 벨기에 경기에서 0-1로 패한 뒤 눈물을 흘리는 손흥민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수 선발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부터 축구계나 언론에선 정성룡에 대한 걱정과 김승규에 대한 칭찬과 기대가 뒤섞였지만, 베스트 11을 정하는 건 전적으로 감독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아마 지난 두 차례의 경기에서 5실점을 한 정성룡이 심리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염두에 둔 홍 감독이 벨기에전에선 김승규를 선택한 게 아니었나 싶다. 모든 건 결과론이다. 벨기에전에선 김승규가 잘했기 때문에 그의 경기력에 대해 칭찬이 쏟아지는 게 당연하다.”
김병지는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감동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한계와 맞서 싸워가는 투지와 열정의 모습들이 축구 팬들에게 공감을 전달하는데, 이번 월드컵에선 이런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한다.
# 애국심·사명감 있었나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8강 진출을 놓고 우루과이와 빗속 혈투를 벌였을 때, 아쉬운 패배 후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중 차두리는 펑펑 울며 석패를 아쉬워했다.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선 손흥민의 눈물이 화제였다. 그만큼 회한이 많았던 월드컵이었을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축구인 B 씨는 손흥민의 눈물 외엔 대표팀 선수들한테서 절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왼쪽부터 김신욱, 김승규.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