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치다” 자폭 배경엔 출생비밀 있었다
한때 도그마 선언으로 세기말 영화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왼쪽은 그가 지난해 연출한 ‘19금 문제작’ <님포매니악> 포스터.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하기엔 부적절하고 또 위험해 보이는, 인종주의적이면서도 나치를 일정 부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이다. 결국 그는 이날 했던 말들 때문에 그는 칸영화제에서 축출되었고, 올해는 베를린영화제에 ‘PERSONA NON GRATA’(기피 인물)이라는 글씨를 새긴 티셔츠를 입고 참석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걸까? 도대체 어떤 질문을 받았길래 그는 그런 과민 반응을 보였으며, 나중엔 농담이라고 하기엔 센 “그래요, 나는 나치입니다!”라는 말까지 하게 된 걸까?
당시 받은 질문은 그의 혈통에 대한 것이었다. 케이트 뮤어라는 평론가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독일 혈통을 언급하며,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나치 미학에 대해 말했던 것을 재차 물었던 것. 담담하게 대답할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평론가의 지적은 라스 폰 트리에의 트라우마를 강하게 건드렸다. 그리고 여기엔 그의 출생의 비밀이 얽혀 있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공산주의자 어머니인 잉거 호스트와 사회주의자 아버지인 울프 트리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강인한 여성이었던 잉거 호스트는 나치가 덴마크를 점령하던 시절 공산당에 가입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궁지에 몰렸고, 결국 스웨덴으로 피신한다. 이곳에서 만난 울프 트리에는 유태인. 그도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웨덴으로 온 처지였다.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후 결혼했고 1945년에 라스 폰 트리에의 형인 올레 트리에를 낳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부모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종종 아이들과 함께 누드 캠프에서 자연을 즐겼고, 교육에 있어서도 철저한 방임주의를 택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 성장했고, 무신론자인 부모 탓에 그 어떤 종교적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어릴 적부터 강한 자립심을 요구받았다. 이런 무한정의 자유는 오히려 라스 폰 트리에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이런 성장 배경이 그의 독특한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길러준 아버지 울프 트리에는 유태인이었고 하트만은 독일계였다는 사실. 33년 동안 자신이 ‘핍박 받던 민족’인 유태인인 줄 알았던 라스 폰 트리에는, 졸지에 ‘가해자’인 독일인이 된 것이다. 당시 생부인 프리츠 미카엘 하트만은 80세의 노인으로서 생존한 상태였는데, 라스 폰 트리에는 네 번 정도 변호사를 통해 그를 만났지만 이후 더 인연을 이어가진 않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생부인 줄 알았던 (이미 세상을 떠난) 유태계 아버지와 결별하겠다는 생각으로, 갑자기 가톨릭을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데뷔작 <범죄의 요소>(1984)는 독일 표현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어머니의 유언으로 자신이 독일 혈통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괜스레 과거를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는 부모와, 아니 이젠 세상에 없는 어머니와 화해해야 했다. 결국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화끈한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내가 울프 트리에의 아들이 아니라 프리츠 미카엘 하트만의 아들이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면서 널 길러준 아버지는 원래 목표도 없고 힘도 없는 인간이었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서 슬펐다. 내 창조적인 기질이 결국 어떤 혈통에 의한 것이었다니…. 만약 자식을 창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거라면, 그리고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일부러 다른 류의 사람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 마지막 인사와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난잡한 년!”
그렇다면 이후 그의 영화들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그의 영화에 언뜻 느껴지는, 여성에 대한 가학적이며 혐오증적 경향이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증오에서 왔을지도 모르겠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