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넘은 사회 양극화…‘괴물’은 죽지 않았다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5명을 납치해 토막 살해한 뒤 시체까지 불태운 6명의 지존파는 체포됐을 당시 카메라 앞에서 태연히 웃어보이기까지 했다.
1994년 추석을 앞두고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지존파 김현양(당시 22세)은 체포 직후 카메라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미리 설계한 ‘살인공장’으로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 5명을 납치해 토막 살해한 뒤 시체까지 불태운 6명의 지존파는 카메라 앞에서 태연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20년이 흐른 2014년 현재, 그 누구도 선뜻 다루지 못했던 90년대 ‘살인의 추억’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가 지난 17일 개봉됐다. 영화는 지존파를 ‘악마의 현현’이 아닌 ‘90년대 모순된 사회상이 낳은 비극’으로 재조명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 서초경찰서 강력1반장이었던 고병천 씨(65)를 만나 못 다한 90년대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찌됐든 ‘지존파’는 나로 인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이다. 떠올리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이 사건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남겨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재직 중 미제사건이 단 한 건일 정도로 고병천 씨의 형사생활은 화려했다. 지존파 담당 형사였던 그는 34년간 현장에서 소임을 다하다 지난 2009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 고 씨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난 2월 박사과정을 수료한 고 씨는 ‘범죄조직에 의한 연쇄살인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34년 현장을 누빈 형사에게도 ‘지존파 사건’은 듣고도 믿지 못할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고 씨는 “마피아 등 조직범죄는 100% 폭력조직이다. 하지만 살인을 목적으로 모인 범죄조직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었다”며 “지존파에 관한 연구논문은 내가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결과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덧붙였다.
지존파 담당형사 고병천 씨.
20년이 지났지만 지존파를 검거하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고 씨는 “당시 평소 알고 지내던 카페사장이 연락이 왔다. 납치당했다 탈출한 종업원을 보호하고 있는데 ‘고 반장’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고 씨는 그렇게 지존파에 납치당했다 기적적으로 탈출한 이 아무개 씨(여·당시 26세)를 경찰서 앞에서 마주했다.
고 씨는 처음에 이 씨가 털어놓은 이야기들을 믿지 못했다. 옆에 있던 사장에게 ‘이 사람 약 먹었나’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단서를 이야기했다. 울산에서 실종신고된 소윤호 사장 부부를 이 씨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 씨가 탈출할 때 가져온 지존파 일당의 휴대폰으로 계속해서 전화가 왔다. 이 씨가 전화를 받지 않자 ‘별 일 없지?’라는 메시지만 남긴 채 전화는 곧 끊어졌다. 고 씨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그 길로 전남 영광으로 달려갔다.
이 씨가 말한 지존파의 아지트는 예쁜 분홍색으로 페인트칠 된 집이었다. 지하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이었다. 지존파 일당은 경찰의 출동에 대비해 아지트에 다이너마이트까지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고 씨와 동료 형사들은 멀리서 잠복에 들어갔다.
날이 밝자 지존파 일당 중 한 명인 강동은(당시 21세)이 차를 타고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고 씨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마주보는 방향으로 차를 운전했다. 그런데 차가 스치는 순간 눈치를 챈 강동은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고 씨는 그대로 차를 박아버렸다. 우왕좌왕하던 강동은은 3m가량 아래 낭떠러지로 뛰어내렸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고 씨도 함께 뛰어내렸다. 결국 꼬리를 잡힌 강동은은 10분 만에 그 자리에서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
고 씨는 “이후에는 유인 작전이 필요했다. 차 사고가 났으니 안에 있는 짐을 챙겨가라고 다른 일당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말을 쓰면 들킬까 현지 경찰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나머지 일당을 검거하는 데는 의외로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존파를 소탕하고 서울로 이동하니 서초서는 이미 기자들로 만원이었다. 고 씨는 “당시 CNN까지 취재를 와 있었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기자들도 있었다. 취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유치장 안으로 들어가 지존파 일당과 열흘 동안 숙식하며 조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당시 고 씨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순진한 모습에 애처로움까지 느꼈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사회에서 빈곤계층이 사회에서 받는 냉대와 멸시로 비롯된 사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 씨는 “지존파는 2번 만들어졌다. 첫 번째 지존파는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애들이었다. 그런데 범죄계획을 듣고 다들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두목 김기환의 성격을 아니까 첫 번째 지존파 애들은 외지로 피신하고 그랬다. 두 번째 모은 애들이 사건의 장본인들이었다. 처음 모은 지존파가 실패하자 더 어렵게 살고 더 못 배운, 삶이 힘든 애들만 모은 것이다”고 말했다.
고 씨는 단지 지존파에 대해 ‘알고 보니 순진한 청년이었다’는 허무한 후일담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존파 사건 이후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1995년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이면에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에 충실한 욕망이 똑같이 있었다고 비판한다. 고 씨는 “지존파 사건을 통해 범죄가 왜 발생하는지, 그것을 예방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없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빈곤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면 이 같은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어디에선가는 지존파만큼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사건개요 영광에 ‘살인공장’ 끔찍…주범 6명 형장의 이슬로 지존파 두목 김기환(당시 26세)은 1993년 4월경 학교 후배 강동은,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과 함께 부유층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범죄조직을 결성하는 데 뜻을 모은다. 지존파는 현장검증할 때만해도 형사를 끌어안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자살할 생각이었지만 경찰들이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일요신문 DB 김기환은 마스칸(히랍어로 ‘야망’이라는 뜻)이라는 조직을 결성했다(지존파라는 이름은 검거 후 담당형사였던 고병천 씨가 붙여준 이름이다. 범인들이 이마에 띠를 둘렀는데 그것에 지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지존파는 범죄 집단을 조직해 힘들게 살거나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조직원을 모으게 된다. 이후 이들은 행동강령을 세우고 1200여 명에 달하는 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1993년 7월 본격적인 범행을 실행하기에 앞서 지존파 일당 6명은 충청남도 논산에서 최 아무개 씨(당시 23세)를 성폭행한 후 연습 삼아 살해 암매장하고, 8월 같은 조직원이던 송봉은(당시 18세)을 역시 살해 암매장했다. 지존파는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의 지하실 아지트에 창살감옥을 만들고 사체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소각시설을 설치했다. 이어서 1994년 9월 이종원과 나중에 극적으로 탈출한 이 아무개 씨(여·당시 26세), 소윤오-박미자 부부를 납치 감금한다. 이후 조직원 김현양이 이 씨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 씨는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씨를 제외한 3명은 모두 살해당했고, 사체는 토막난 채 소각됐다. 지존파는 9월 15일까지 4차례에 걸쳐 엽기적인 연쇄 살인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이 씨 제보로 9월 19일 범인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1심과 항소심, 대법원 최종판결에서도 검거되기 이틀 전에 조직에 가담한 이경숙을 제외한 두목 김기환을 비롯하여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등 지존파 전원은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95년 11월, 김기환을 비롯한 지존파 조직원 6명의 사형 집행이 모두 이루어졌다. [배] |
1994년 <일요신문> 보도 내용 “남친 목 안조르면 너도 죽어” 1994년 추석 무렵 터진 지존파 파문은 희대의 살인마 사건으로 장안이 떠들썩했다. 당시 <일요신문>도 지존파 사건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기사는 지존파에게 납치됐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해 경찰에 신고, 사건해결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 아무개 양의 진술을 사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1994년 <일요신문>에 보도된 지존파 관련 기사 양수리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이 양과 이 아무개 씨의 차를 앞뒤로 막고 납치하면 장면, 몽둥이로 사정없이 이 씨를 때리고 이 양을 겁탈하는 장면 등이 묘사돼 있다. 그리고 전남 영광의 살인공장으로 끌고 가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원하는 이 양에게 한 범인이 “여기 온 여자들 모두 잘난 척하고 밥을 먹지 않다가 결국 떠나고 말았다”고 협박하는 장면도 나온다. 범인들은 납치해온 이 양과 이 씨에게 “토할 때까지 먹어야 한다”며 양주와 소주를 섞어 강제로 마시게 했다. 특히 한 범인은 이 양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같이 잡혀 온 이 씨의 목을 조르도록 강요했다. 한 범인은 옆에서 “목을 조르지 않으면 아가씨도 죽어”라고 설득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이 양은 자신만은 계속 살려두는 범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부부가 또 납치돼 왔다. 이 양은 이번에도 이들의 살해에 가담하게 된다. 범인들이 이 양에게 섬뜩한 공기총 한 자루를 쥐어주며 남편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이번에도 이 양의 목에는 회칼이 겨눠져 있었다. 이 양은 이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벌써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본 부인은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였다. 그런 부인에게 칼 한 자루씩을 들고 다가간 범인들은 그의 온 몸을 난자해 살해했다. 그것도 모자라 범인들은 토막내 소각장에서 불태워버렸다. 이 양이 탈출하게 된 것은 당시 범인 가운데 한 명이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다 폭발사고가 발생해 영광시내 병원까지 이 양도 따라가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두 번이나 범인들을 도와 살해한 이 양을 그들도 믿었기 때문이었다. 무서움에 도망갈 생각조차 못하던 이 양은 여러 차례 마음을 고쳐먹은 끝에 결국 병원문을 빠져나와 경찰에 신고하면서 지존파들의 인간 살육은 막을 내리게 된다. 당시 김현양은 충격적인 발언으로 국민들의 치를 떨게 했다. 그는 체포된 뒤 “어머니도 내 손으로 못 죽여 한이 된다”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당시 <일요신문> 취재진은 김현양의 집을 찾아가 어머니를 인터뷰했다. 어머니는 연신 “너무 너무 엄청난 일을 저질러 미안하고 죄스러울 따름”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주변에 따르면 어머니에 대한 김현양의 증오는 어릴 적부터 싹틔워진 듯했다. 김현양의 성장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한 마을주민은 “어머니의 복잡한 남자관계가 어린 김현양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당시 어머니는 자신을 못 죽인 게 한이라는 아들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며 강하게 부정했다고 한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