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힘든 부분은 처음 5분가량과 마지막 1분가량이었다. 현실에서 벌어진 실화를 영화의 이야기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초반 5분, 그리고 다시 영화를 현실로 끄집어내는 마지막 1분이 관객 입장에서 많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피해갈 수도 외면할 수 없는 영화이기에 꾹 참고 끝까지 봤다.
현실에선 실존 인물인 고 황유미 씨의 얘기지만 영화는 허구의 인물인 한윤미의 이야기다. 속초에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한상구(박철민 분)는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평범한 아버지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대학에 보내주지 못한 큰딸이 대기업 진성전자에 취업한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 열심히 돈 벌어 아빠의 택시를 새 차로 바꿔주고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윤미, 그렇지만 윤미는 입사 2년도 채 안돼 백혈병에 걸려 돌아온다. 그리고 힘겹게 병마와 싸우던 윤미는 사망한다. 자신이 모는 택시 안에서 숨진 윤미의 손을 잡고 상구는 다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을 알려달라는 윤미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아빠가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그렇게 시작된 상구는 고인이 된 딸 윤미가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소송을 걸고 절대적으로 불리한 법정 공방에 돌입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결정적 한계는 스포일러다. 이미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 결말까지 알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한윤미(박희정 분)가 결국 사망한다는 것, 그리고 한윤미는 1심 재판에서 승소해 산업재해를 인정받게 된다는 스포일러가 공개돼 있다.
영화평을 시작하며 스포일러부터 밝히는 것은 매우 옳지 않는 일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영화 속 한윤미의 실존인물인 고 황유미 씨를 보도하는 기사를 접했을 것이다. 또한 잘 모르던 이들 역시 영화 <또 하나의 약속> 개봉 즈음 각종 논란과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됐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고 황유미 씨를 비롯한 희귀병이 발병한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려주는 데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스포일러는 그만큼 중요하다.
다만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팩트를 이야기로 구성한 영화로 재확인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겹다. 기자가 개인적으로 보기 힘든 영화였다고 고백한 까닭 역시 여기에 있다. 특히 초반 5분, 한윤미가 최고의 대기업 진성전자에 입사하게 돼 온가족이 모여서 기뻐하는 장면은 바라보기 힘겹다. 효녀이자 좋은 누나인 윤미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회사에 입사하게 돼 모두가 축하하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미 입사 이후 윤미가 겪게 될 희귀병과 사망, 그리고 가족들이 받을 상처를 다 알고 보는 이 가족의 모습은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마지막 1분은 한윤미가 아닌 실존인물 고 황유미 씨와 그의 부친 황상기 씨의 얘기가 실제 그들의 사진과 자막으로 그려진다. 또한 시민단체 반울림에 제보된 비슷한 상황의 노동자들 얘기, 그리고 진행 중인 소송 얘기 등이 다시 이야기가 아닌 팩트로, 영화가 아닌 기사의 형태로 그려진다. 다시 우리는 영화 속 허구의 인물 한윤미를 보내고 현실 속 고 황유미 씨와 대면하게 된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지난 2월 개봉 당시 개봉관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렇지만 몇 달 뒤인 5월 결국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문제와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또한 합당한 보상도 약속했다. 물론 여전히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분명한 변화가 시작됐으며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이 과정에서 분명한 역할을 했다.
이런 영화적 배경은 <또 하나의 약속>을 보다 진지하게 관람하기 위해선 피해야 하는 스포일러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현실이기에 꼭 필요한 정보이기도 하다. 부족한 기자 역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아니었자면 고 황유미 씨의 이야기를 모른 채 이 시대를 살아갔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특히 영화의 중심이 돼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끌어 간 박철민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낸다. 대표적인 신스틸러인 박철민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코믹 연기의 진수를 선보였지만 이번 영화에선 평범한 소시민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며 시민운동에 앞장서게 되는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유명 배우가 되기 전 젊은 시절의 박철민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가 왜 이 영화를 선택했으며 얼마나 진심을 다해 한상구 역할에 다가갔는지 이해하리라.
젊은 여배우인 김규리 역시 돋보였다. 스타급 배우들이라면 꺼릴 법도 한 민감한 영화에서, 그것도 대기업과 맞서는 노무사 역할을 맡은 김규리는 안정감 있는 연기를 선보였다. 박철민이 캐릭터의 심경 변화를 보여주며 영화의 흐름을 주도해 나갔다면 김규리는 의로운 노무사의 캐릭터를 안정감 있게 끌고 가며 영화에 무게와 감성을 더했다.
또한 윤유선 김영재 이경영 정진영 박혁권 장소연 김선영 등 모든 배우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좋은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