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실은 판정 남발 선배 행세 그 심판 기피대상
두산의 송일수 감독이 심판 판정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모습.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심판보다 기계를 더 믿게 된 시대. 한쪽은 “야구의 인간적인 맛을 잃었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심판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고 한다. “그저 세계적인 흐름에 발을 맞춘 것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느 쪽이 옳든 상관없이, 야구 심판은 여전히 막중한 임무와 권한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 신중하고 더 책임감 있는 의식이 필요한 직업이다. 반대로 늘 불신의 눈초리와 거센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기에 더 외롭고 고된 자리이기도 하다.
# 얼굴에 가래침 맞고 감독과 몸싸움
KBO는 1982년 3월 총 15명의 심판에게 처음으로 임명장을 수여했다. 9명의 전임 심판과 6명의 지방 주재 심판이었다. 야구와 관련된 다른 모든 직업이 그랬듯,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상황이 무척 열악했다. 첫 심판들은 동대문구장 앞 의류점에서 자기 돈을 내고 유니폼을 맞췄다. 경기 때 사용하는 보호 장비도 당연히 자비로 구입했다. 일본제품이 비싸 대만제품을 사서 썼는데, 공에 맞으면 프로텍터가 바로 휘어질 정도로 품질이 좋지 못했다. 그나마도 심판 한 조에 한 세트씩밖에 못 샀다. 장비 하나를 가지고 3~4명이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게다가 그 무거운 장비를 들고 버스에 올라 전국을 누벼야 했다. 고속도로도 열악하고 고속철도도 없던 시절의 일이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어딜 가나 욕부터 먹었다. 베테랑 심판 출신인 A 씨는 “대구 경기에서 관중에게 가래침을 맞은 적도 있다. 계속 욕을 하는 관중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하필이면 내 뺨에 정통으로 붙었다. 화가 나서 철망을 향해 마스크를 던졌다가 징계를 받았다”고 털어 놓았다. 김응용 감독처럼 다혈질인 원로 감독들은 종종 심판들과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또 다른 베테랑 감독과 실랑이를 벌이다 부상을 당한 심판도 나왔다.
두산의 칸투가 주심의 스트라이크 판정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심판들 대부분이 선수 출신이라 불편한 점도 생긴다. 베테랑 B 심판은 늘 야구장에서 많은 학교 후배들을 만난다. 특히 현역 코치와 선수들이 많다. 그는 “사석에서는 절대 만나지 않는 게 원칙이다. 항상 먼저 피했다”며 “식당도 야구하는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으로 골라서 간다”고 했다. 행여 식사를 하다 구단 관계자들이라도 마주치면 더 불안하다. 절대 합석하지 않는 건 9개 구단의 불문율. 다른 이들의 눈에라도 띄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다. 구단에서 밥값 계산이라도 해줬다가는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게다가 심판을 대놓고 무시하는 풍토도 심해졌다. C 심판은 “요즘은 우리를 그라운드 관리인처럼 막 대하는 사람들도 많다”며 “경기를 보다가 TV 영상으로 오심이 확인되면 즉시 KBO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구단도 있다”고 한탄했다. 한 구단 관계자는 “오심 문제가 불거지면서 선수들조차 심판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탓에 항의가 지나칠 정도로 거세졌다. 심판들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해서 더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 권위 남용으로 선수들과 갈등
물론 심판의 권위와 권한을 악용하는 이들도 가끔 있었다. 프로야구 TV 중계가 거의 없던 시절에는 오심이 나와도 다시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일부 몰지각한 심판들은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살짝 ‘봐주기’도 했다. 또 중계가 있는 날 애매모호한 판정이 나오면, 경기장 전광판에 그 영상을 틀지 못하게 은근히 홈 구단에 압력을 넣는 심판도 있었다. 감독들은 “심판판정에 항의하고 싶어도, 찍히면 오히려 그 다음에 더 안 좋은 판정을 할까봐 꾹 참을 때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한국야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심판학교에서 심판 지원자들이 실기 수업을 받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전통적으로 심판이 감독과 선수들에게 더 많은 원성을 산 부분은 오심이 아니었다. 심판과 현장이 야구 선후배 관계로 얽힌 한국적 구조가 갈등을 불렀다. 많은 선수들은 “일부 심판이 야구 선배라는 점을 앞세워 감정적으로 대응한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베테랑 D 선수는 “선수들을 그라운드 안에서 먼저 후배로 대해 다들 기피하는 심판이 있다.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면 바로 다음에 감정적 판정이 날아와서 애를 먹은 적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국에서 1년간 뛰었던 투수 용병 E도 “선수들이 심판들을 선배로 대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가끔 마운드에서 혼잣말로 판정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면 심판들이 불쾌해하는데, 원래 한국 고유의 정서인가?”라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 F 감독 역시 “심판들 절대 다수가 선수 출신이라 병폐가 많은 것 같다”며 “미국이나 일본처럼 심판 아카데미의 문호를 개방해서 비 선수 출신들이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많이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체력은 필수…선수처럼 시즌 준비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로야구 심판이 고된 직업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선수들처럼 겨울에 단체 훈련을 하면서 시즌을 준비하고 체력도 단련한다. 한 시즌 일정이 선수들과 다름없이 빡빡하고, 3시간이 훨씬 넘는 경기 내내 서 있어야 하니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아서다. 자연스럽게 비시즌에도 등산과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든다. 하체 힘을 기르기 위해 지하철에서도 앉지 않는다.
앞서의 베테랑 B 심판은 특히 눈 보호에 힘쓴다. 인터넷도 잘 하지 않고, 밤에는 책도 읽지 않는다. TV 시청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눈이 피로하면 혹시 판정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B 심판은 “특히 구심을 맡을 때에는 며칠 전부터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 구심은 한 경기에서 300개가 넘는 공을 판정하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며 “심한 사람은 구심을 한번 하고 나면 2~3㎏씩 살이 빠지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