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에 필적할 인생역정
성 씨 남매의 아버지 성유경은 경남 창녕의 만석꾼 대지주의 종손이었고, 어머니 김원주는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기자로 일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광복 후 본격적인 좌익 노선에서 활동했다. 아버지 성 씨는 남로당 중앙위원이었고 어머니 김 씨는 남조선 여성동맹 문화부장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주변에는 좌·우익을 망라해 조병옥 장택상 모윤숙 등 정치·문화계에 폭넓은 지인들이 많았다.
어머니 김 씨는 48년 4월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참가차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는데 이때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아버지 역시 서울에서 좌익 활동 때문에 서대문형무소를 자주 들락거렸다. 성 씨 남매는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혀 우울한 초·중등 시절을 보냈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성일기 씨는 북한에, 두 여동생은 남한에 있었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우선 아들 먼저 비밀리에 38선을 넘도록 한 것. 성 씨가 보성중학을 막 졸업했을 49년 2월 무렵의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남로당의 위세가 갈수록 약해지던 시기여서 당초 해외 유학을 보내고자 했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성 씨는 회령에 있는 군관학교에 입대해야 했다. 그가 빨치산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두 여동생은 서울에서 각각 진명여중과 풍문여중을 다니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들 세 남매의 운명을 또 한 번 뒤바꿔놓고 말았다. 남한에 남아 있던 아버지와 두 여동생은 모두 어머니와 함께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인민군으로 내려온 성 씨는 빨치산이 되어 경북 울진 부근을 근거지로 남아 있었다. 동해 남부 전구 참모장이었던 성 씨는 53년 체포되었지만 당시 빨치산 토벌 사령관이었던 방첩부대장 김창룡 소장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사형을 면했다. 하지만 그는 이후 50년 동안 철저히 자기 신분을 속이며 숨죽여 지내야 했다.
성 씨는 국내에서 결혼해서 1남2녀의 자녀를 뒀다. 그는 지인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했으나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했다. 그래도 세 남매를 대학까지 졸업시키기 위해 프레스 공장에서 일하는 등 상당히 힘든 세월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북으로 넘어간 가족들도 고충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휴전 직후 북한에서 불어닥친 남로당계 대숙청 바람에 <로동신문>에서 근무하던 어머니는 지방지로 좌천되었고, 남한의 대지주 출신인 아버지 역시 노동현장을 전전해야 했다. 이 와중에도 머리가 명석했던 큰딸 혜랑 씨는 김일성대학 물리수학과를 졸업하고 59년 국방대학 교수였던 이태순과 결혼, 일남(이한영의 본명)과 남옥 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남편은 교통사고로 68년 사망했다.
얼굴이 예뻤던 혜림 씨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월북작가 이기영의 큰아들과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영화배우를 지망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영화광이었던 김정일 위원장의 눈에 띈 것도 이 무렵이다. 혜림 씨는 이혼을 하고 김 위원장과 동거하며 아들 정남을 낳았다. 하지만 이혼녀였던 혜림 씨는 김일성 주석의 인정을 받지 못해 다른 안가에서 별도의 생활을 해야 했다. 아들 정남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김 위원장은 이모인 혜랑 씨에게 정남의 가정교사를 맡기고 이종사촌인 일남·남옥 남매로 하여금 정남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혜랑·혜림 자매와 그들의 아들 딸인 일남·남옥·정남은 이때부터 한가족처럼 지내며 북한의 비공식적인 ‘로열패밀리’가 됐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이후 재일동포 출신의 미녀 무용수 고영희와 사랑에 빠지게 됐고 그와의 사이에 아들 정철이 태어나면서 비공식적 로열패밀리는 점차 평양의 중심에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