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기자는 홍콩 영화 마니아다. 이로 인해 중국 영화까지 관심이 많다. 심지어 중고교 시절엔 비디오대여점의 홍콩 및 중국 영화는 모조리 빌려서 봤을 정도다. 이 정도 마니아라면 홍콩 등 중화권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배틀M‘ 코너에서도 중화권 영화에 대한 기자의 평가가 비교적 좋은 편이었는데 이 역시 이런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일염화>라는 영화 앞에서 기자는 멈춰 서고 말았다.
<백일염화>, 중국 원제는 <白日焰火>이며 영어 제목은 <Black Coal, Thin Ice>다. 러닝타임 106분. 아무래도 중국 원제 <白日焰火(백일염화)>는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장면인 한 낮의 불꽃놀이를 의미하는 제목으로 주요 배경 가운데 한 곳인 나이트클럽의 이름이기도 하다. 반면 영어 제목 <Black Coal, Thin Ice>는 극중 연쇄 살인 및 사체 유기 수법과 관련된 제목이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다소 많이 지루하다. 연쇄 살인과 엽기적인 토막 사체 유기가 등장하고 여주인공을 둘러싼 치정까지 얽혀있다. 나름 반전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마치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는 지루하리만큼 매우 천천히 진행된다.
그렇지만 러닝타임 내내 암울한 분위기가 유지되면서 긴장의 끈이 끊기지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독특한 매력이다. 영화를 더욱 지루하게 만들 만큼 암울한 분위기와 매서운 추위의 이미지들은 어느새 자신만의 이미지와 색채를 완성해 오히려 영화를 진중하게 끌고 간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도 가장 추운 지역인 동북지역인 해룡강성의 한 도시가 영화의 배경이다. 우리에겐 안중근 의사 때문에 익숙한 하얼빈이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매서운 추위와 아직은 경제 개발이 미흡한 하얼빈이라는 도시의 모습은 마치 60~70년대의 한국과도 비슷한 이미지가 많이 엿보인다. 경제 개발이 덜 된 낙후한 도시의 모습은 강추위와 묘한 조화를 이룬다. 60~70년대 한국의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 추웠던 것과도 일맥상통 한다 랄까.
아무래도 이런 암울한 분위기가 추위와 빈곤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중국 해룡강성의 하얼빈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제64회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남자 주인공 요범의 진중한 연기의 힘도 돋보인다. 요범은 이 영화로 제64회 베를린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형사, 아니 전직 형사 장즈리 역할의 요범은 진중하게 살인 사건을 수사해 나가고 결국 범인 검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리 좋게 평가하려해도 스토리나 반전은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그나마 중반까지는 범인이 누군지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지만 너무 지루한 진행이다. 중반 이후 범인이 드러나고 또 다시 반전이 등장하는 과정에선 이야기 전개가 조금 속도를 내지만 오히려 흥미는 반감된다. 결국 드러난 반전의 실체에서 반전의 쾌감보다는 실망감이 밀려온다. 게다가 반전 이후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는 너무 통속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여주인공 우즈정(계륜미 분)의 모호한 관계다. 우선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들과 모두 관계가 있는 우즈정과 남편이었던 첫 피해자와의 관계가 모호하다. 모든 걸 다 내어준 헌신적인 사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집착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즈정과 남자 주인공 장즈리(요범 분)의 관계 역시 모호하다. 과연 우즈정에 대한 장즈리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결말 부분에서 수사 종결을 기념하는 회식 자리에서의 장즈리와 백일염화를 날린 뒤 막춤을 추는 장즈리의 상반된 모습은 이런 모호함을 극도로 끌어 올린다. 이런 모호한 감정선과 심리를 제대로 표현한 덕분에 장즈리 역할의 요범이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이 된 게 아닌가 싶다.
@ 줄거리
1999년 한 탄광 마을에서 발생한 토막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장즈리(요범 분)는 수사 도중에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져 용의자들과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이로 인해 장즈리는 부상을 당하고 동료 경찰 두 명이 사망한다. 이 일을 계기로 장즈리는 경찰을 그만 두고 사건 역시 미제로 남는다.
5년 뒤 장즈리는 하얼빈의 한 공장의 경비원으로 지내고 있지만 늘 술에 취해 있다. 형사를 그만두고 술에 취해 망가진 삶이 하얼빈의 맹추위와 어우러진다. 이렇게 허무한 나날을 보내던 장즈리의 삶은 우연히 자동차에서 잠복 미행 근무 중이던 옛 동료 왕 반장을 만난 뒤 달라진다.
왕 반장 일행이 맡고 있는 사건은 두 건의 토막살인 사건으로 2001년과 2004년에 벌어졌다. 공통점은 우즈정(계륜미 분)이라는 여성과 관련된 이들이라는 것. 2001년 살해 피해자는 우즈정과 결혼을 앞둔 상황이었고 2004년 살해 피해자는 우즈정과 막 사귀기 시작한 사이였다.
장즈리가 더욱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1999년 토막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우즈정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이다. 첫 남편에 이어 재혼을 앞둔 남성에 연인까지 우즈정을 둘러싼 세 남성이 모두 토막살인 사건으로 사망했다.
이에 장즈리는 손님으로 가장해 우즈정이 일하는 세탁소를 찾으며 우즈정에 접근한다. 그 역시 우즈정의 연인이 된다면 토막살인 사건의 범인이 접근해올 수 있다.
실제로 장즈리와 우즈정의 데이트를 미행하는 정체불명의 남성이 등장하고 홀로 그의 뒤를 쫓던 왕 반장까지 살해당하고 만다. 과연 범인의 실체는 무엇이며 왜 우즈정을 둘러싼 남성들을 연이어 토막 살해하는 것일까.
@ 배틀M이 추천 ‘초이스 기준’ : 스토리보단 심리 묘사의, 암울하지만 진중한 분위기의 영화를 찾는다면 클릭
기본적으로 이야기 전개가 느릿느릿한 영화다. 그 빈틈을 배우들의 심리 연기, 그리고 하얼빈의 강추위와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암울한 화면이 채우고 있다.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수 있는 영화다. 스피디한 이야기 전개와 볼거리를 찾는 관객에게는 추천할 만한 영화가 아니지만 독특한 이 영화의 분위기에 서서히 젖어들면서 배우들이 펼치는 심리 연기의 묘미에 빠져들 준비가 돼 있는 이들에게는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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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대중적인 영화는 아니다. 분명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남자 주인공 요범의 연기력과 캐릭터는 매력적이다. 또한 암울하면서도 고독한 영상이 긴장감 있게 이어지는 연출 기법도 좋은 영화지만 대중적이진 못하다. 기본적으로 스토리 라인이 다이내믹하지 못하며 범인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의 과정이 지루할 만큼 더디게 진행된다. 대중적인 영화가 아닌 이런 색깔의 영화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인 터라 제64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임에도 다소 낮은 가격을 책정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