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박근혜 테러 세뇌한 배후 있다”
▲ 박근혜 대표에게 테러를 가했던 지충호 씨가 ‘단독범행’이라는 주장을 뒤집어 파문이 예상된다. | ||
지난해 5월 20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테러를 가한 뒤 구속 기소돼 서울 영등포구치소에 수감 중인 지충호 씨(51)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지 씨는 “큰 사건을 터뜨려 주목받고 싶었을 뿐 사주 받은 바도, 살해 의도도 없었다”며 배후세력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일축해왔다. 하지만 지 씨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어졌음에도 이 사건을 바라보는 미심쩍인 시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개인적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는 그의 범행동기가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과거의 억울함과 한나라당을 연결짓는 고리도 석연치 않았다. 더구나 지 씨에게 흘러들어온 자금의 출처와 사용처가 명쾌히 드러나지 않은 점 등이 또 다른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게 사실이다.
이처럼 지 씨의 행동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지 씨가 지인을 통해 “사건의 배후인물이 존재한다”고 폭로, 충격을 주고 있다. 17일 지 씨의 측근 인사인 A 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 씨가 주장하는 박 전 대표 테러사건의 ‘전모’에 대해 상세히 전했다.
A 씨는 방송가의 인물로 사업 중 자금난에 빠져 지난해 경제사범으로 8개월간 영등포구치소에서 복역한 바 있다. 당시 지 씨와 각별한 친분을 맺었다는 A 씨는 기자와 만난 당일에도 지 씨를 접견하고 오는 길이었다.
A 씨는 이미 수개월 전부터 지 씨에게 박 전 대표 테러사건의 배후인물에 대한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한다. 배후세력에 대한 A 씨의 질문에 지 씨는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A 씨가 지 씨의 탄원서를 써주는 과정에서 놀라운 얘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사실은 나를 꾀어 범행을 사주한 배후인물이 있다”는 게 지 씨가 어렵사리 밝힌 얘기였다는 것. 그리고 지 씨는 범행을 사주한 당사자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다는 것이다.
지 씨는 그간 A 씨에게 때가 되면 사건의 진실에 대해 폭로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그리고 수감생활로 인해 외부와 자유로운 의사전달이 불가능한 지 씨는 자신보다 먼저 출소하게 되는 A 씨에게 ‘전모’를 대신 폭로해줄 것을 전적으로 위임했다는 것. 17일 오전 A 씨가 지 씨를 면회하러 갔을 때 지 씨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지 씨는 이미 오래전부터 작심한 듯 ‘지충호는 말하고 싶다’라는 제목까지 스스로 정해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시리즈’로 분류해 놓은 상태였다는 것. 지 씨가 A 씨에게 털어놓은 얘기는 그동안 언론에 보도됐던 그의 말을 완전히 뒤집는 내용이었다. 지 씨 얘기의 핵심은 “박근혜 테러사건은 자의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나로 하여금 일을 저지르게끔 사주한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지 씨가 A 씨에게 사주자로 지목한 인물은 한 정계 인사다. A 씨는 지 씨 본인이 조만간 이 인사의 실명 등 구체적인 실체에 대해 직접 밝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A 씨에 따르면 이 인사는 지 씨를 수시로 불러 앉혀놓고 박 전 대표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얘기의 수위 또한 일반인들이 하는 정치인에 대한 단순한 흠집내기나 험담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 이 인사는 박 전 대표에 대해 차마 듣기 거북한 적나라한 욕설을 퍼부었고 또 지 씨에게 박 전 대표가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까지 서슴없이 언급했다는 것. 지 씨는 이 인사의 그러한 언행이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지난해 5월 일어났던 박근혜 대표 피습사건 당시 모습. 노컷뉴스 | ||
지 씨에게 이 인사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고정 수입도 없는 자신에게 찾아갈 때마다 수시로 쥐어주는 적잖은 돈도 더없이 고마웠다는 것. 안 그래도 과거의 안 좋은 기억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던 지 씨 앞에서 이 인사가 박 전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을 거론하며 ‘박근혜 때문에 내가 못 살겠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고 탄식을 해대자 지 씨는 마치 마음에 빚을 진 듯 괴로웠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들어 지 씨는 이 정계 인사 측에서 자신의 ‘기질’을 교묘히 이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 씨는 이미 1984년 한 여성의 얼굴을 면도칼로 상해하고 다섯 차례나 폭력혐의로 기소되는 등 일반 사람들에 비해 즉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낸 전력이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즉 이 씨는 이 인사 측에서 자신의 ‘욱’하는 성격과 단순하고 불 같은 기질을 자극하기 위해 사실상의 ‘세뇌’를 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박 전 대표 테러의 당위성을 주입하는 동시에 대가성 돈을 쥐어주며 사실상 노골적으로 ‘행동개시’를 부추겼다는 것이 지 씨의 주장이다. 이 인사 측에서 용돈과 활동비 명목으로 150만~200만 원씩 건네준 돈이 지 씨의 범행을 촉발시키는 매개체로 작용했다는 것. 지 씨는 한나라당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은 갖고 있었지만 박 전 대표에 대해 테러를 가할 정도의 증오나 복수심은 없었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 씨는 심지어 A 씨에게 “박 전 대표 테러는 철저히 음모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바로 대선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 씨는 그 일례로 “사건 후 대처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도 있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즉 “무조건 한나라당 욕을 해라. 과거에 억울한 점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한나라당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표출하라”는 것이 예의 정계 인사 측에서 알려준 대처방법이었다는 것. 이 각본대로라면 지 씨는 개인적인 억울함을 참다 못해 평소 증오하던 한나라당의 수장을 상대로 테러를 가한 것이고, 사건은 자연히 과거 전과가 있는 사이코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숱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침묵했던 지 씨가 갑자기 배후세력의 존재에 대해 폭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A 씨는 “지 씨는 그동안 자신을 조종한 배후인물이 확실히 있다고 했다. 적당한 때를 봐서 밝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재판이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것을 보고 불안해했다. 그래서 폭로 시기를 앞당긴 것 같다”고 전했다.
또한 예의 정계 인사 측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도 지 씨가 입을 열게 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 A 씨는 “박 전 대표를 피습하는 대가로 모종의 딜이 있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사건 후 이 정계 인사 측에서는 지 씨와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지 씨는 지난 18일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상해죄 및 공직선거법위반죄, 공갈미수죄가 적용,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상태다. 비록 살인미수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지 씨는 자신의 형량에 대해서도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억울한 심정을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배후세력이 있다’는 지 씨의 갑작스런 폭로는 과연 어디까지 사실일까. 중형을 선고받은 지 씨의 불만이 빚어낸 돌출 해프닝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더 큰 사건의 서막을 알리는 걸까. 결국 조만간 지 씨가 밝히겠다고 전한 ‘사주자’의 실체와 폭로의 근거가 드러난 뒤에야 흑백이 가려질 것 같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