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한 호흡으로 봐야 제 맛인데 극장이 아닌 집에서 영화를 볼 경우 종종 끊어서 보게 된다. 이는 영화에 대한 몰입을 저해하는 행위이나 극장이 아닌 집에서 영화를 봐야 하는 상황에선 감내해야 하는 한계다.
기자 역시 <신의 한수>를 끊어서 봤다. 추석 연휴 기간에 VOD 서비스로 이 영화를 접했는데 첫 날 90분가량을 보고 다음 날 나머지 30여 분을 이어서 봤다. 늦은 밤 갑자기 잠에서 깬 아이가 운 탓인데, 이로 인해 기자는 이 영화를 전혀 다른 두 가지 느낌으로 접하게 됐다.
러닝타임 118분인 이 영화는 크게 구분해 ‘도박’과 ‘복수’를 그리고 있다. 영화의 주된 소재는 ‘바둑’이지만 이 영화에서 바둑은 도박의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그러니 바둑 영화이기보단 도박 영화, 도박 영화라기 보단 복수 영화에 가깝다. 도박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인 <타짜> 시리즈가 만화가 허영만 화백의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데 반해 이 영화는 바둑을 활용한 도박이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작됐다.
실제로 <신의 한수>에선 <타짜> 1편의 냄새가 난다. 바둑 용어로 단락을 나눠 놓은 편집부터 캐릭터 하나하나에 개성을 실으려 노력한 부분, 무엇보다 도박을 주된 소재로 했다는 부분 등이 그렇다.
그렇지만 내실은 다소 빈약하다. 우선 캐릭터의 한계가 아쉽다. 주인공 태석(정우성 분)부터 그가 도박판에 휘말리기 전에 어떤 인물이었는지가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다. 살수(이범수 분)는 그냥 악역일 뿐 그가 왜 그렇게 잔혹한 인물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배꼽(이시연 분), 주님(안성기 분), 왕사범(이도경 분), 꽁수(김인권 분), 허목수(안길강 분), 량량(안서현 분), 아다리(정해균 분)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넘쳐 나지만 개성만 넘칠 뿐 각각의 사연은 빈약하다. 분명 개성 넘치고 살아 숨 쉬는 캐릭터가 좋은 영화의 핵심 요소다. 그런데 <신의 한수>의 캐릭터들은 개성은 남치지만 살아 숨 쉬진 못한다. 이로 인해 영화를 볼 땐 흥미진진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엔 뭔가 허전하고 뒤끝이 개운치 못하다.
스토리의 개연성 역시 크게 떨어진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교도소에서 만난 조폭두목(최일화 분)이다. 그는 태석에게 (액수는 정확치 않지만 대략) 수십억 원은 돼 보이는 복수 자금을 대주며 복수를 위한 싸움의 기술까지 전수한다. 태석의 바둑 실력으로 인해 일주일의 귀휴를 다녀온 데 대한대가인데 대가치곤 너무 과해 보인다. 그가 태석에게 왜 이런 큰 도움을 주는 지, 그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지 등이 그려졌으면 영화가 더욱 튼실해졌겠지만 특별출연일 뿐인 최일화의 비중은 거기까지가 끝이다.
여하튼 영화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캐릭터들의 개성으로 인해 관객을 쉽게 몰입시킨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여기에는 배우들의 명연기가 일등공신이다. 정우성을 비롯해 이범수 김인권 이시연 등이 가세했으며 안성기 안길강 이도경 최일화 정해균 등 베테랑 조연 배우들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여기에 아역배우 안서현도 큰 활약을 보탠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에 배우들의 명연기가 더해진 데다 가장 쉽게 몰입할 수 있는 ‘복수’가 주된 소재인 터라 바둑을 둘 줄 모르는 관객들도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영화다.
이런 터라 기자는 첫날 90분가량의 분량을 보면서 너무 깊게 <신의 한수>에 빠져들었다. 이제 막 태석 일당(정우성 김인권 안성기 안길강)과 살수 일당이 최후의 한 판을 가지려는 순간에 영화를 중단해야 했다. 결말 부분이 궁금해 밤잠을 설쳤을 정도다.
문제는 남겨진 28분 이었다. 결말은 매우 허망했다. 기본적으로 정우성이 이범수를 이기는 과정에서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 ‘신의 한수’는 없었다. 게다가 복수는 바둑이 아닌 주먹을 통해 이뤄진다. 왜 바둑을 활용해 어렵게 복수를 계획한 것인지, 영화 앞부분이 의미를 잃어버릴 정도다. 처음부터 간단하게 주먹으로 해결하면 될 터인데 왜 바둑알을 두고 낑낑대며 동료가 죽어가는 데도 가만히 있었는지 이해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하루 전 너무 재밌게 본 앞부분 90분이 미안할 만큼 둘째 날 본 28분은 극도로 실망스러웠다. 대표적인 용두사미 영화로 기록될 수 있을 정도의 결말이다.
아무래도 감독은 후속편을 위해 감춘 이야깃거리가 있는 듯하다. 신의 한 수를 둘 수 있는 전설적인 인물이 부산에 있다는 얘기가 중간에 잠시 언급되는 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태석 일당은 부산으로 떠난다. 아무래도 부산에 있다는 전설적인 인물이 속편에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방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으로 태석과 바둑을 둔 전설적인 인물의 얘기 역시 속편에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속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 연출 기법은 좋았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본편에선 보여준 얘기가 너무 없다. 게다가 태석의 바둑 실력은 주먹 실력보다 한참 아래다. 결국 복수도 바둑이 아닌 주먹으로 복수가 이뤄진 만큼 이 영화는 ‘도박과 복수의 영화’가 아닌 ‘주먹과 복수의 영화’다. 허망한 결말이 영화의 본질까지 뒤바꾼 셈이다.
한마디로 정리해 <신의 한수>는 너무 재밌게 보다가 결말에서 김이 확 빠져버린 영화다. 마치 중간고사에서 만점을 받고 각종 리포트도 모두 A 이상을 받았지만 기말고사에서 백지를 내는 바람에 겨우 F는 면하고 D 학점을 받은 영화라면 적절한 비유일까.
@ 줄거리
프로 바둑기사 태석(정우성 분)은 내기바둑판에 빠진 형(김명수 분)의 다급한 도움 요청으로 내기바둑판에 휘말리게 된다. 그렇지만 거기서 처음 만난 살수(이범수)의 음모로 형은 세상을 떠나고 태석은 형을 살해한 누명까지 쓰게 된다.
교도소에서 우연히 바둑을 좋아하는 조폭두목(최일화 분)을 만난 태석은 바둑 실력으로 그를 돕고 그 대가로 출소하면서 엄청난 복수 자금을 지원받는다. 또한 복역 시절 태석은 복수를 위해 조폭두목 일당에게 싸움의 기술까지 전수 받는다.
형이 사망할 당시 함께 내기도박판에 있었던 꽁수(김인권 분)을 만나고 우연히 교도소 독방에 갇혔을 때 알게 된 정체불명의 남자가 소개해준 주님(안성기 분)까지 만난 태석은 살수 일행에 대한 복수를 준비한다.
내기바둑 도박판의 거물인 살수는 엄청난 인력을 갖추고 있다. 거기에는 프로기사 출신인 배꼽(이시영 분), 그리고 중국에서 데려온 바둑 천재 량량(안서현 분) 등도 포함돼 있다. 량량은 주님은 물론 태석보다도 빼어난 바둑 실력을 갖춘 천재다.
과연 태석의 복수는 성공할 수 있을까.
@ 배틀M이 추천 ‘초이스 기준’ : ‘복수’를 소재로 한 할리우드 B급 영화를 좋아한다면 클릭
엄격히 말해 영화 <신의 한수>는 바둑이나 도박이 아닌 복수를 그린 영화다. 심지어 결말에선 복수의 직접적인 수단은 바둑과 도박이 아닐 정도다. 바둑과 도박은 그냥 극의 흐름에 속도를 높이고 재미를 더하는 윤활유 수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둑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다. 영화는 복수에 올인하며 개성 있는 캐릭터로 힘을 더한다. 그래서 쉽게 빠져들어 즐길 수 있는 영화다. 결말이 다소 허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복수’ 하나에 초점을 두고 관람하면 그마저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할리우드 B급 영화에서도 복수는 흔한 소재인데 어지간한 할리우드 B급 영화보다는 더 재밌게 관람할 수 있다.
@ 배틀M 추천 ‘다운로드 가격’ : 1000 원
첫날 본 90분 정도 까지만 놓고 보면 10000 원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가 있다. 그렇지만 결말에 이른 뒤에는 허망한 결말과 개성은 있지만 살아 숨 쉬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한 캐릭터의 아쉬움으로 인해 추천 다운로드 가격은 1/10인 1000원이 되고 말았다. 단순히 즐기기 위해 킬링타임용으로 이 영화를 관람하고자 하는 이들 입장에선 결코 1000원이 아깝지는 않은 수준일 것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