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음녀’ 남편 물건 터뜨리다
작가가 말하는 ‘잡인’이란 무엇일까. 어느 시대나 등장하는 사회적 반항아, 기인, 괴짜, 별종 등 억압적인 세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라 한다. 제도와 관습의 굴레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재능에 충실하게 살다간 조선시대 ‘잡인’들 속으로 들어가보자.
# 난봉녀 김 씨
어우동, 사방지 등 조선시대의 음녀하면 떠오르는 인물 외에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음녀가 ‘잡인’으로 소개된다. 그 주인공은 문하시랑 찬성사 김주의 딸 김 씨다.
김 씨의 음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얘기는 김 씨와 두 번째 남편 이지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김 씨는 첫 번째 남편 조화가 죽자 태조 이성계의 심복인 영돈녕 부사 이지와 재혼하게 된다.
김 씨가 이지와 혼례를 올렸을 때 김 씨의 나이는 무려 57세. 하지만 이지는 김 씨와 첫날밤을 보낸 후에 “나는 이 분이 늙었는가 했는데 참으로 늙지 않은 것을 알았다”며 흐뭇해했다고 하니 ‘밤일’ 하나는 대단했던 모양. 실록에는 김 씨에 대해 “늙을수록 아름답고 음란하여 더욱 요염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지와 김 씨의 혼인생활의 끝은 좋지 않았다. 이지는 섣달그믐이 돼 부인 김 씨를 데리고 향림사에서 며칠 동안 제를 올렸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자다가 부인 김 씨가 없어 밖에 나가보자 김 씨가 한 승방에서 중과 간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지는 “참으로 요사스러운 계집”이라며 김 씨를 마구 매질했는데 여기서 사단이 나고 만다. 매를 맞던 김 씨가 이지의 고환을 잡아당겨 터트려버린 것. 이지는 이 자리에서 죽고 김 씨는 귀향길에 올랐다.
김 씨는 쓸쓸한 말로를 맞이하긴 했으나 수절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조선시대의 편견에 대적하며 여인의 욕망을 맘껏 펼친 인물로 묘사된다.
# 정력가 김생
김 씨가 최고의 ‘음녀’라면 김생은 조선시대 오로지 정력 하나로 부자가 된 ‘음남’이다. 김생은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아전으로 풍채가 좋고 기운이 좋은 ‘장사’였다. 서른도 되기 전에 아들을 10여 명이나 나았다는 부분은 그의 왕성한 생식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생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금장사에 뛰어들게 됐고 이 장사로 먼 동네를 다니며 상당한 이익을 얻게 됐다. 하지만 대단한 정력가였던 김생이 매일 밤 부인과 교합을 못하니 그에게는 괴롭기만 한 나날이었던 것.
어느 날 김생은 과부 홀로 사는 집에 하룻밤 숙식을 청했다가 교합까지 하게 됐다. 게다가 과부는 “다음날 또 와달라”고 교태까지 부리며 소금까지 넉넉하게 팔아주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맛들인 김생은 그 뒤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과부들과 정을 통한다.
김생의 왕성한 생식력에 그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여인네들은 어김없이 아이를 갖게 됐다는데 이런 생활을 한 지 20년이 지나자 김생은 아들만 83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후에 만경평야에 100칸이 넘는 집을 짓고 여자들과 자식들을 함께 살게 했는데 그곳에서 김생이 아들들만 데리고 황무지를 개간해 첫해에 수확한 것인 메밀 700석, 2년 후에는 1000석, 3년 후에는 2000석을 거뒀다고 한다.
#자린고비 유래
한편 ‘자린고비’에 관한 설화도 소개되고 있다. 설화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는 충주에 사는 ‘고비’라는 사람의 얘기다. 고비는 젊어서 장사로 큰돈을 번 인물로 사람들은 돈을 모은 비결을 알고싶어 고비를 자주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면 고비는 으레 사람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고 밑으로 충주 남한강이 흐르는 아찔한 절벽에 솟아있는 소나무에 매달리라고 말했다. 그곳에 매달리면 “한쪽 손을 떼라”고 말하고는 이런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돈을 아끼는 것을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것처럼 하라.” 돈을 쓰면 죽을 것처럼 아끼라는 말이다.
두 번째 설화는 인조 때 충북 음성에서 참봉 조유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조륵에 얽힌 얘기. 굴비를 천장에 걸어놓고 쳐다보며 밥을 먹었다는 얘기, 부채가 닳을까봐 부채를 걸어놓고 고개를 흔들었다는 얘기 등 친숙한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륵은 말년에 가난한 이웃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모두 나눠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영호남에 흉년이 들자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조정에 재산을 헌납해 영조가 이를 기려 ‘자인고비(慈仁考碑)’라는 이름의 송덕비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