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의 경계 ‘가로지르기’
“나는 아름다움에 가장 관심을 둔다.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히 ‘인공미’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인공미의 핵심을 ‘페티시즘’으로 보아, 나의 페티시인 ‘긴 손톱’의 이미지를 늘 변주시켜 묘사한다. 나는 이런 집착에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작가의 말에 한편으로는 묘한 흥분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외설이나 표절 시비 등과 관련한 재판, 해직 등 작가가 겪었던 고난이나 소설이 비닐에 갇힐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생각할 때 그의 집착에 비장감마저 든다.
소설집은 마 교수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쓴 <개미>부터 최근까지 쓴 단편 30편을 모았다. 맨 앞에 수록된 작품 <슬픈 사라를 쓴 죄>의 줄거리는 이렇다. <즐거운 사라>를 읽고 결말에 불만을 느낀 ‘나’는 비극적 결말의 <슬픈 사라>를 쓰고 저승사자에게 잡혀간다. ‘신성한 성, 그리고 특별히 맛있는 성인 변태성욕을 감히 폄하하고 비하’시킨 죄다. 변태성욕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다짐하고 잠시 세상에 보내진 ‘나’는 바에서 만난 ‘손톱의 길이가 무려 15㎝나 되는’ 여자와 마음껏 프리섹스를 즐긴 후 마음을 바꾼다. 다시 살아난 ‘나’는 지금은 호스트바에서 일하고 있다. 마 교수의 작품 선언인 듯하다.
표제작인 <발랄한 라라>는 애인과의 섹스를 옆에서 봐 달라는 의사의 부탁을 받은 ‘발랄한 라라’의 성적 상상력이 마음껏 폭발하는 작품이다. 소설에서 발랄한 라라는 이렇게 말한다. “신음 끝에 남는 것은 물론 짙은 페이소스다. 하지만 그 ‘짙은 페이소스’가 감미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쩐 일일까….”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말처럼 ‘성을 정면으로 보고 그 본질을 뚫고 들어가려면 결국은 외설이라는 경유지를 거칠 수밖에’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 교수의 소설은 앞으로도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는 계속 쓸 것이다. 그리고 과연 장석주의 말처럼 외설과 예술의 ‘경계 사이’를 그가 빠져 나갈지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이규용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