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험대리점 했다는 고 씨 “출근하면 계속 울려대는 보험취소 전화벨, 정말 무서웠다”
- 납품업 했다는 심 씨 “지갑 속 천원짜리 7장...딸 위한 통닭 한마리의 슬픈 기억”
[일요신문]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1997년은 아픔이다. 불과 1년 전 선진국의 상징이라던 OECD에 가입한 한국은 끝없는 경제호황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나라는 외환위기 속에서 IMF와 구제금융 협상을 맺고, 거짓말같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IMF사태는 재앙이었다. 그 여파는 사회를 넘어 ‘최후의 보루’라 하는 가정으로 침투했고, 개개인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댔다. 그 재앙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당시를 그린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11월 28일 개봉했다. 영화 개봉일 상영관에는 장년들이 유독 많이 찾았다. ‘일요신문’은 상영관을 찾은 그들을 직접 만났다.
고성준 기자=서울 종로의 한 상영관 앞에서 신작 ‘국가부도의 날’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장년층들의 모습.
11월 28일 오전 11시 45분 서울 종로의 한 멀티플렉스 상영관에는 한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날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를 그린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하는 날이었다. ‘보헤미안 랩소디’나 ‘성난 황소’ 등 다른 경쟁작들의 상영관에 젊은 세대들이 주로 자리한 것과 달리 ‘국가부도의 날’ 상영관에는 유독 나이 지긋한 장년들이 눈에 띄었다.
최국희 감독의 ‘국가부도의 날’은 김혜수, 유아인, 조우진, 허준호 등 명품 배우들의 캐스팅 라인업만으로도 큰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개봉 첫날에만 예매율 1위에 관객수 32만 명이란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배우들은 한국은행의 공정심 높은 열혈 실무자(김혜수)로서, 냉혈하고 이기적인 엘리트 관료(조우진)로서, 위기를 기회로 삼는 퇴직 금융맨(유아인)으로서 그리고 오로지 가족과 동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평범한 우리네 가장(허준호)으로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각자 처한 모습을 열연했다.
114분의 러닝타임으로 짜인 영화는 “모든 투자자들은 한국을 떠나라. 지금 당장”이라는 월스트리트 증권맨의 긴급 송신 메일을 시작으로 한국이 당시 외환위기 속에서 어떤 긴박한 과정과 갈등 거쳐 ‘경제 식민지’라 하는 IMF 구제금융 사태까지 나아가게 되는지 담담하게 그려냈다. 부채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경제 구조에서 비롯된 재앙이 어떻게 한 순간 한 가정과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세세하게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영화의 백미였다.
그리고 특히 허준호가 호연한 ‘평범한 가장’ 갑수의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고군분투는 이날 상영관을 찾은 중년들의 눈시울을 붉히기 충분했다.
영화가 끝나고 장년의 관객들이 우르르 빠져 나왔다. 기자는 총 두 타임에 걸쳐 상영관의 장년층 관객들과 마주했는데, 저마다 21년 전의 아픈 기억을 더듬었는지 먹먹함이 느껴졌다. 기자는 그들에게 21년 전을 물었다.
고성준 기자=장년의 노신사가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를 들여다 보고 있다.
동료들과 상영관을 찾은 자영업자 김 아무개 씨(61)는 영화 중간에 눈시울을 붉혔는지 두 눈은 충혈 돼 있었다. 김 씨는 “영화 속 갑수의 처지가 정말 남 같지 않았다. 나 역시 비슷한 일을 당했다. 21년 전 덤프트럭 세 대를 두고 운영했다”라며 “토목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벌이도 괜찮았지만, 무너진 건 순식간이었다. 당시 건설 현장에선 모든 대금이 어음으로 지급됐다. 어느 순간 두 세 달씩 미뤄지더라. 몇 달을 고리의 ‘어음깡’으로 버텼다. 각종 토목사업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더니 결국 어음 명의의 중간 운수업체가 부도를 냈다. 밀린 기사 임금을 갚을 길이 없어 집을 내놓았다. 당시 두 아이가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집사람이 정말 고생 많았다”고 과거를 소회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영화에선 사장이나 직원이 서로 어려움 속에서 보듬어 주지만, 현실은 냉혹했다”라며 “5년 넘게 함께 했던 동생 같은 고용 기사가 어음이 부도난 뒤 매일같이 밀린 임금을 독촉해 대며 악을 썼다. IMF가 깨트린 것은 주머니 사정뿐만이 아니라 사람 간 관계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다.
빨간 목도리를 멋스럽게 매고 나홀로 영화관을 찾은 멋쟁이 고 아무개 씨(66)는 그 당시 보험 대리점을 운영했단다. 그의 머릿속 1997년엔 무엇보다 ‘전화벨의 공포’가 있었다.
“보험사에 다니다 기세 좋게 사표를 내고 보험대리점을 차렸다. 그땐 많은 영업사원들이 그랬다. 상품도 좋았고, 동료들도 양질이었다. 더군다나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시작부터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 외환위기를 전후해서 정말 거짓말처럼 전화가 울려댔다. 보험계약 취소 전화였다. 출근하면 그 전화 벨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경기가 안 좋으면 보험부터 손을 댄다는 얘기가 있다. 몇 년을 버티다 대리점을 접고 그 뒤엔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당장 아이가 한창 돈 들어가는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악착같이 버텼다.”
‘국가부도의 날’ 영화 속 허준호가 호연한 ‘갑수’는 당시 아버지의 전형이었다. 출처=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제과 제품을 슈퍼에 납품했다는 심 아무개 씨(58)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딸아이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평소 영화관을 잘 찾지 않은 심 씨는 오늘 영화티켓도 이제는 성인이 된 딸이 예약해 준거란다.
“원래 슈퍼 납품은 외상거래가 당연했다. 물건 납품하고 반년 뒤 받는 일도 허다했다. 외환위기를 겪고 거래하던 슈퍼들이 줄도산을 했다. 밀린 외상대금을 받을 수 없었다. 빤히 사정을 아는데 사장님들을 다그칠 수도 없었다. 1998년 12월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아이가 기말시험이 끝났다고 통닭을 사달라고 하더라. 그 때 닭 한 마리가 정확히 7500원이었다. 주머니에 딱 7000원 있더라. 마지못해 통닭집 사장님한테 읍소하면서 500원을 깎아 아이에게 사다 먹인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이날 영화관을 찾은 장년들은 그래도 여유와 시간이 있는 분들이었다. 어렵사리 위기를 극복하고 험난한 악몽에서 벗어난 분들이었다. 지금이야 추억으로 회고하고 있지만, 사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그래도 악착같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은 영화의 한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 된다. 영화 속 가장 갑수는 어음 부도를 맞고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중 베란다 창문으로 향한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순간 그의 눈엔 두 아이 방에 걸려있는 아이들 이름 석 자가 들어온다. 그리곤 그 고통 속에서 갑수는 슬며시 창문에서 내려온다.
결국 오늘 영화관을 찾은 장년의 아버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던 가족과 자식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년의 아버지들은 과거를 회고하면서 하나같이 자식과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