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두 얼굴 우린 알고 있다
▲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 ||
최근 인터넷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국내 여성비서 102명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비서의 눈으로 바라본 대한민국 CEO 조사’가 바로 그것. 이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CEO 유형은 ‘감정에 치우치는 다혈질형’이다.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막무가내형 CEO’도 여비서들을 슬프게 했다.
이른 출근, 늦은 퇴근, 휴일근무 등 ‘일 중독형’으로 고무줄 출퇴근 시간을 고수하는 CEO가 그 다음 순위를 이었다. 업무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잔소리형’도 비서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보스다. 여비서들의 옷과 헤어스타일 등 외모에 참견하는 ‘시어머니형’도 피하고 싶은 건 마찬가지. 55.9%(복수응답)로 ‘스트레스 주는 보스’ 1위에 오른 ‘다혈질형 CEO’는 툭하면 화를 내는 ‘버럭 보스’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실수나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자주 내니 비서 입장에서는 힘들 수밖에.
이런 경우 여비서들이 더 주눅이 들어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패션업계의 한 CEO는 비서가 자주 바뀐다. 비서뿐 아니라 회사 직원들도 자주 바뀐다. 그만큼 견디기 힘들다는 얘기다. 수년 전 사회 초년병 시절 그 보스 밑에서 근무했던 C 씨(31)도 한 달을 겨우 버티고 그만뒀다.
“결벽증에다 강박증까지 있는 분이었어요. 자주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은 먼지 하나 없어야 했지요. 냉장고에는 음료수를 가지런히 배치해야 했는데 하나라도 없어지면 귀신같이 알고 직원들을 추궁했어요. 전용 화장실에 치약은 항상 반 정도 쓰면 새것으로 바꿔놔야 했고요.”
53.9%를 차지한 ‘막무가내형 CEO’도 여비서들을 힘들게 하는 부류다.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이들은 무리한 지시를 하면서 비서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중견기업 대표를 보필했던 K 씨(29)는 지시만 내리면 바로바로 준비가 되는 줄 아는 CEO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다. 본인이 배가 고프지 않다고 비서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여기거나 중요한 약속을 시간이 다 돼서 갑자기 취소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일 정도였다.
그 뒷수습에 허둥대는 것은 K 씨의 몫이었다.“새벽에 전화해서 조찬 안 간다고 연락하라고 할 때는 미치죠. 전날 저녁에 말해주든가. 갑자기 그러면 참 당황스러워요. 무슨 일이든 지금 당장, 내일까지 해내라고 닦달하는데 자기 머릿속에서만 진행되던 일을 갑자기 지시하면 당장 끝낼 수 있나요? 늘 급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대표 때문에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경우도 많았어요.”
CEO와 항상 함께 움직이다 보니 비서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고무줄 같은 출퇴근시간이다.CEO의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하는 비서의 업무 특성상 이른 출근, 늦은 퇴근은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39.2%의 여비서들이 가장 싫어하는 보스도 이 ‘일 중독형’으로 개인 약속을 정할 수 없어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비서 경력 5년차인 G 씨(30)는 휴일근무는 물론 항상 CEO의 스케줄에 매여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언제 퇴근할지 모르니까 친구들하고 약속을 잡아도 으레 저는 오거나 말거나식 취급을 받죠. 휴일에도 비상대기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구요. 평소 사무실에서 일할 때도 보스가 언제 찾을지 모르니까 화장실에도 맘 놓고 제대로 못 가서 동료 중에는 변비에 걸린 사람이 있을 정도예요.”
CEO가 비서를 배려하면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데다 무리한 스케줄도 비서는 당연히 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보스들이 대부분이다. 화장실이 급해도 자리 비우지 말고 전화 받으라고 하거나 출퇴근 시간 무렵에 이것저것 갑자기 많은 업무 지시를 내리는 CEO는 비서들을 눈물짓게 한다.이번 설문조사 항목에는 없었지만 사실 비서들이 가장 기피하는 CEO 유형이 있다.
애인 다루듯 비서에게 지나친 스킨십을 시도하는 타입이다. 현재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L 씨(28)는 비서 생활 초반 경험한 불쾌한 경험 때문에 전직했다.“비서를 전문분야로 인정하지 않는 CEO들이 적지 않아요. 일부는 비서들을 심부름꾼이나 애인쯤으로 생각하지요. 제가 모셨던 분은 평소에도 돈 문제나 여자문제가 많았고 인간관계에서도 뒷거래도 자주 하는 보스였는데 저한테 자꾸 스킨십을 시도해서 참다못해 그만뒀습니다.
이렇게 비서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분들은 사실 업무 능력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더군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비서에 대해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CEO들은 비서들에게도 무능한 보스로 여겨질 뿐이다. 이외에 외부 사람들 앞에서는 고고한 신사인 척하면서 내부 직원들에게는 버럭 대는 ‘두 얼굴형 CEO’도 비서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