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한번 할래?’
개봉을 앞둔 영화 <여고괴담5>의 포스터는 아슬아슬한 옥상 난간 위에 서있는 소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동반자살’이라는 부제목부터가 상당히 자극적이다.
‘동반자살’은 최근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다.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사건 이후 자살은 부쩍 늘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자살한 사람은 1만 1194명(하루 평균 30.7명)으로, OECD 국가 중 10년째 1위.
‘자살바이러스 열풍’의 근원지는 인터넷에 은밀하게 개설된 자살사이트다. 죽음을 원하면서도 정작 행동에 옮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찾게 되는데 이들과 가장 쉽게 접촉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자살사이트. 문제는 이들 사이트가 자살을 방조하거나 동반자살을 부추기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자살 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종범죄까지 등장했다.
4월 28일 서초경찰서는 자살을 결심한 여성들을 ‘동반자살’ 명목으로 유인, 성폭행하고 자살을 종용한 자살 블로그 운영자 정 아무개 씨(32)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 씨는 최근 연예인 및 일반인들의 잇따른 자살보도를 보고 기막힌 범행을 계획하게 됐다. 인터넷 사이트에 자살방법을 공유하거나 동반자살 대상자를 물색할 수 있는 자살 블로그를 개설한 정 씨는 블로그에 접속한 젊은 여성들에게 접근했다.
정 씨는 23일 오후 8시 50분경 자신의 자살 블로그에 접속한 A 양(19)을 서초동의 한 모텔로 유인했다. 극단적인 결심을 하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망설이던 A 양은 ‘같이 죽자’는 정 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정 씨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자살 희망자들의 심신이 극도로 미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몹쓸 짓을 할 계획을 꾸몄던 것이다. 정 씨는 A 양에게 술을 먹인 뒤 본색을 드러냈다. A 양이 취기를 느끼자 정 씨는 “이대로 죽으면 처녀귀신이 된다” “죽기 전에 한 번 하고 싶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A 양을 성폭행했다.
정 씨의 몹쓸 행각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정 씨는 다음날인 24일 오후 8시께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접속한 B 양(17)을 모텔로 유인, 수차례 성폭행했다. 여성들과 같이 죽을 것처럼 위장한 정 씨는 여성들을 성폭행한 후 금품을 빼앗는 파렴치함을 드러냈다. 또 정 씨는 자살사이트를 통해 터득한 자살방법을 피해자들에게 알려주며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지만 피해자들이 거부해 미수에 그쳤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을 상대로 이뤄진 정 씨의 파렴치한 행각은 ‘딸이 유서를 남기고 사라졌다’는 A 양 가족의 신고로 드러나게 됐다. 휴대전화 위치 추적 등을 통해 A 양을 찾아낸 경찰은 그녀로부터 정 씨의 범행수법을 파악, 서초동의 한 PC방에서 정 씨를 검거했다. 검거 당시에도 정 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접속한 여성들을 상대로 또 다른 범행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굳이 정 씨의 범행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재 우리사회에서 자살은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전염병처럼 번지는 동반자살은 삶의 무게에 허덕거리는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실제로 4월 한 달 동안 강원도에서만 11명이 자살했는데 이들은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동반자살을 감행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급기야 경찰은 자살사이트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강희락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를 통해 “경찰청 사이버수사대를 중심으로 자살사이트 운영자를 색출해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자살을 방조하거나 동반자살을 부추기는 사이트들을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의 자살사이트는 겉보기에는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운영되고 있다. 가장 흔한 수법은 고민상담 명목으로 위장하는 경우다. 또 ‘자살’이라는 단어 대신 자살을 연상시키는 다른 단어들을 검색어로 대체하고 있다. 주로 자살한 국내외 연예인들의 이름이나 우울증 등 자살과 밀접한 병명, 자살에 이용되는 방법이나 독극물, 자살에 대한 이론 등에서 따온 단어들이다.
국내외 유명 아티스트의 자살을 미화시켜 자살을 충동질하기도 한다. “전설적인 뮤지션 ○○도 이렇게 죽었죠” “부족할 것 없는 그들도 결국은 숭고한 선택을 했습니다”라는 글도 올라와 있다. ‘베르테르 효과’에 쉽게 반응하는 젊은이들은 이러한 게시글에 현혹되기 쉽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장용’이 아닌 순수한 고민 나눔방 등에서도 동반자살 유혹이 어김없이 도사리고 있다는 덤이다. 즉 일반 카페나 블로그 등에서도 자살에 대한 쪽지나 메시지들이 오가고 있다는 것. 실제로 진로문제나 종교 취업 실연 등의 고민을 나누는 공간에 있다 보면 “저도 님과 같은 생각 중인데…” “함께 용기내 볼까요?”라는 쪽지가 날아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심지어 “고통 없이 죽는 방법 알려드립니다” “길동무(동반자살)를 찾습니다”라는 노골적인 내용의 쪽지도 온다.
정신과적 상담을 하는 공간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인들이 고통받는 정신질환인 강박증이나 대인기피증, 우울증, 조울증, 무기력증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치료하는 공간이 동반자살 모의공간으로 변질되기도 한다는 것. 심지어 자살예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이트에서 ‘길 벗’을 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