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잣대…속타는 검날
▲ 오른쪽 사진 대검찰청, 왼쪽 사진 서울지방법원 | ||
지난 5월 8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 한 지역에서 변사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이길여 씨(가명·여·94)로 경찰 조사 결과 현장에서 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을 신고한 가족들은 “이 씨가 평소 ‘치매끼’가 있어 잘 넘어졌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가족들의 진술과 이 씨의 시신 바로 옆에 박혀있는 날카로운 돌을 근거로 이 씨가 넘어지면서 돌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계하고 사건 발생 당일 저녁, 청주지검 영동지청에 사건을 넘겼다.
하지만 사건을 인계받은 검찰은 경찰의 결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 실족사로 보기엔 석연찮은 점들이 몇 가지 있었던 것. 우선 경찰의 기록엔 사망자 이 씨의 머리에 15cm나 되는 큰 상처가 있었는데, 이는 단순히 넘어져 돌에 부딪쳐 생긴 상처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 사망자가 입고 있던 바지의 구멍난 부분과 무릎 찰과상 부위도 일치했는데 이도 넘어져서 생길 상처는 아니었다. 시신이 무언가에 걸려 몇 센티 이상 끌려갔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타살 가능성을 직감한 검찰은 법원에 시신을 부검하기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사건 다음날인 9일 부검 영장이 떨어졌다. 경찰이 영장집행 준비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틀 후인 11일 사망자 이 씨의 가족 중 한 명이 경찰서에 찾아왔다. 죽은 이 씨의 아들 김춘영 씨(가명·남·55)였다. 그는 경찰에서 “사실은 내가 실수해 트럭으로 치는 바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자수했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지난 5월 8일 집 앞 길에서 자기 소유의 화물트럭을 후진하다가 차량 뒤쪽에 쪼그려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국과수 부검 결과에서 ‘또 다른 가능성’이 분석됐다. 부검의는 “사망자 이 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머리뼈, 가슴뼈, 허리뼈 등 복합적으로 골절이 발견됐다”는 부검결과와 함께 이로 보아 사망자가 수차례에 걸쳐 차량에 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견을 밝혔다.
또 검찰은 사망자 이 씨의 다른 가족들로부터도 의심스런 정황 진술을 확보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고 씨가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평소 어머니에게 재산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했었다”고 증언했던 것.
부검의와 다른 가족들의 진술을 들은 검찰은 ‘존속살인일 수도 있다’고 보고 지난 5월 13일 법원에 김 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런데 법원은 영장을 기각했다. 청주지법 영동지원은 “김 씨의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법원의 판단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거가 일정한 것 외에는 법원의 기각사유를 수긍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검찰은 사고 당일 이 씨가 아들 김 씨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길이었기 때문에 김 씨가 어머니가 앉아있는 줄 모르고 후진하다 교통사고를 냈다는 진술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또 피의자 김 씨가 어머니의 장례를 지나치게 서두르고 어머니가 사고 당일 입고 있었던 옷 등을 소각하려 하는 등 이미 증거인멸을 수차례 시도했었다고 검찰은 밝혔다.
영장을 기각한 판사실 측에서는 “불구속재판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고 말한 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불구속재판 원칙에 비쳐 구속 여부를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고로 법원의 구속영장 발부율은 2007년 78.28%에서 2008년 77.51%로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검찰 측에서는 “법원이 불구속 방침을 세우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문제는 영장기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권한이 남용되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5월 16일의 대구지방법원의 영장 기각에 대해서도 검찰은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사인에 의문이 있는 변사체에 대한 부검영장을 법원이 기각해버린 것.
지난 5월 16일 대구 영천시 금호읍의 한 교각 밑에서 상당히 부패한 변사체가 발견됐다. 확인결과 이 변사체는 6일경 가출신고가 돼 있던 최 아무개 씨(여·84)였다. 최 씨는 치매환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 따르면 최 씨는 가출신고 후 10일 만에 발견된 데다 사체의 부패 정도가 심각해 육안이나 간단한 조사로는 사망일시, 원인 등을 알아내기 어려웠다. 때문에 검찰은 부검이 필요하다고 보고 영장을 청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원은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살인 사건일 가능성이 있음에도 법원에서 원인규명 자체를 막는 이상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영장담당 판사 측에서는 “영장 청구 사유만 봤을 때는 범죄혐의가 없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며 “검찰 측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엔 석연치 않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 측에서는 “부검영장 청구 지휘를 할 때에 해당 법원의 한 판사가 직접 검찰에 지휘철회를 요청하는 전화까지 건 적이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전화를 건 판사는 영장담당 판사는 아니었지만 변사자 아들과는 친척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판사가 영장기각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고 섣불리 단정할 일도 아니지만 영장청구에 앞서 검찰에까지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의심을 살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 측에서는 이런 일련의 영장청구 기각 사례에 대해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경찰이 1차 수사를 소홀히해 덮어질 뻔한 중대사건을 밝혀냈지만 구속영장을 기각당했고, 변사체의 사인을 밝혀내기 위해 올린 부검영장도 기각당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수사를 하라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불구속 원칙이 점차 확산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며, 그 와중에 검찰의 손발을 묶는 일도 생길 수 있다”며 “법원은 불구속원칙을 완전하게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도 영장 기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