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자마자 ‘3대 숙제’ 먹구름이…
입행 30년 만에 수장에 오른 박진회 한국씨티은행장에 대해 자격 논란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위 사진은 한국씨티은행 본점 건물. 구윤성 기자 kysplanet@ilyo.co.kr
14년간 ‘장기집권’했던 하영구 전 행장에 이어 제2대 한국씨티은행장에 오른 박진회 행장은 CEO(최고경영자)로서의 첫 출근길인 지난 10월 28일 자신을 가로막는 부하직원들과 마주서야 했다.
씨티은행 직원들은 박 행장의 선임과정부터 문제 삼았다. 노조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들은 은행장 선임이 “무능력과 무소신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박 행장과의 면담이 이뤄진 뒤 출근저지를 풀었지만, 양측의 앙금까지 말끔히 지워졌는지는 의문이다.
박진회 행장은 사실 1984년 씨티은행에 입사해 30년여 동안 몸담아온 정통 ‘씨티맨’이다. 중간에 삼성증권으로 잠시 ‘외도’를 했지만, 자금담당과 기업금융 본부장, 재무담당 부행장 등을 거쳐 지난 2002년부터는 수석부행장에 올라 씨티은행의 ‘2인자’ 역할을 10년 넘게 수행해왔다.
이렇듯 평생을 씨티은행에 바쳐온 박 행장을 둘러싸고 ‘자격시비’가 일고 있는 까닭은 뭘까. 우선 하영구 전 씨티은행장과의 각별한 인연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박 행장은 하 전 행장의 경기고-서울대 무역학과 후배다. 게다가 두 사람은 각각 전남 강진과 전남 광양 출신으로 사실상 동향이다.
‘사연(社緣)’은 말할 것도 없다. 박 행장이 씨티은행에 입사한 것은 1984년으로, 서울대와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런던정경대를 졸업한 뒤 한국개발연구원(KDI)을 거쳤다. 그는 2004년 한미은행이 씨티그룹에 인수돼 씨티은행 서울지점과 합병하면서 당시 한미은행장이던 하영구 행장과 만나게 됐다. 통상 흡수합병된 조직의 수장은 물러나게 마련이지만 하영구 행장은 특유의 능력을 인정받아 통합씨티은행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 행장은 이후 10년간 한국씨티은행을 이끌며 국내 최장수 은행장의 기록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박 행장은 부행장으로 하 행장을 보좌하며 2인자 역할을 맡았다. 박 행장은 특히 씨티그룹이 운영하는 후계자 양성제도인 ‘CEO 승계 프로그램’에 참가, 사실상 오래전부터 차기 행장으로 내정된 상태로 알려졌다.
이처럼 10년간 하 전 행장을 보좌해온 인물인 데다 그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인해 박 행장은 2인자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심지어 지금도 하영구 전 행장이 씨티은행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고, 박 행장은 그의 지시에 따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하고 있을 정도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하영구 전 행장이 자신의 복심인 박진회 행장을 후임에 앉힌 뒤 안심하고 물러나 다른 자리에 도전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하 전 행장이 KB금융 회장에 지원할 당시 은행장 자리를 내놓지 않다가 안팎에서 비판이 일자 갑자기 물러나는 등 퇴임 과정이 깔끔하지는 않았다”면서 “후임을 맡게 된 박진회 행장으로서는 부담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2010년 한국씨티금융지주 출범 당시 하영구 행장(왼쪽 세 번째)과 박진회 기업금융그룹장(왼쪽 네 번째) 등의 테이프커팅 모습.
금융당국이 제재를 검토 중인 D 사 부당대출 사건에 박진회 행장이 연루됐는지 여부도 향후 그의 행보에 영향을 줄 전망이다. 씨티은행은 지난 2월 삼성전자 납품업체인 D 사가 매출채권 등을 위조해 1700만 달러의 허위대출을 받았다며 검찰에 고발했다. 씨티은행은 D 사가 대출 원금과 이자를 제대로 내지 않자 삼성전자를 통해 납품관계 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서류위조 등을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당시 D 사 대출을 승인한 총책임자가 박 행장이라는 점이다. 허위대출 논란이 불거질 당시 박 행장은 기업금융부문을 책임지는 부행장을 맡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 대출건에 직접 개입해 압력을 행사하는 등 부당행위를 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부실대출 책임 논란에 휘말린 인물이 은행장에 올랐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사건은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만약 부당대출 등 은행의 잘못이 드러나면 금융당국이 박 행장에게 제재조치를 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불거진 지수연계증권(ELS) 불건전 판매 논란도 부담이다. 씨티은행 경영진이 판매절차 규정을 위반해 ELS를 팔도록 직원들에게 강요했다는 것인데, 금융감독원이 씨티은행에 ELS 불건전 판매 행위를 중단하라고 지시하면서 후폭풍이 예고된 상태다. 금융권에 따르면 씨티은행 경영진은 영업점 직원들에게 목표 고객을 정한 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SNS) 등을 통해 ELS 상품을 홍보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금융투자상품 관련 법규는 ELS처럼 위험성이 높은 상품은 고객에게 직접적인 홍보를 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따라서 씨티은행 경영진의 행위가 사실로 밝혀지면 불건전 영업에다 고객보호위반 등 엄중한 처벌이 가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금감원은 현재 씨티은행의 ELS 영업 과정에서 위법 행위가 있었는지를 면밀히 조사하는 중인데, 만약 박 행장이 지시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그 역시 제재를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추락하는 씨티은행의 실적을 어떻게 되돌려 놓을지 역시 박 행장 앞에 놓인 무거운 숙제다. 씨티은행은 지난 2분기 816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물론 이는 대규모 희망퇴직에 따른 퇴직금 지급분이 반영된 영향이 크지만 핵심 수익성 지표들이 다른 시중은행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다.
금융권의 다른 관계자는 “취임하자마자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박 행장은 한편으로는 조직 안정에 박차를 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 타개책을 제시해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며 “무엇보다 하영구 전 행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홀로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