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입장·위원장선거 ‘애증’ 교차
▲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50년 만에 동시입장했다. 남북이 하나가 된 데는 사마란치의 도움이 컸다. | ||
늘 사마란치 옆을 지키던 부인 비비스 여사가 시드니 올림픽에 처음으로 오지 않았다. 얼마 안가서 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추도식을 가졌다. 솔트레이크 사건 때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여파로 사망한 것 같다고 했다. 비비스 여사는 몸가짐이나 말솜씨가 ‘올림픽 퍼스트레이디’로 손색이 없는 분이었다. 2000년에 필자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비비스 여사가 내 가족에게 인상적인 축하편지를 보내왔는데 우리 가족들은 그것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비비스 여사는 앙드레 김 의상을 좋아했다. 그 덕에 앙드레 김은 서울, 바로셀로나, 애틀랜타 올림픽 기간에 패션쇼를 가질 수 있었다.
2000년 4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IOC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1999년 IOC 총회가 브라질의 유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열리게 되자 사마란치는 올림픽 유치를 꿈꾸던 브라질에서 IOC 집행위원회를 열도록 해준 것이다. 이때 한반도에서는 김대중 정부에 의한 남북대화가 시작되고 화해무드가 무르익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IOC의 집행위원이지만 KOC 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으로서 한국의 국익을 추구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남북의 단일팀 구성은 바람직하지만 기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았고 동서독의 전례를 생각해서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 때 남북동시입장을 추진하기로 마음을 먹고 사마란치에게 제안을 했다.
평화와 번영을 내거는 IOC로서는 대찬성이고 사마란치는 IOC 차원에서 (남북동시입장을) 추진하기로 IOC 집행위원회 석상에서 결정했다. 이때 사마란치는 “김운용 위원이 머리가 좀 돌아가는 것 같다(아이디어가 좋다는 뜻)”며 좋아했다 한다. 그 다음날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IOC 위원장 이름으로 제안서를 보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회신을 기다리는 중에 나는 평양의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동행했다. 혹시 좋은 회신이 있나 찔러보아도 평양에 있는 동안에는 아무 반응을 얻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게 “이야기 좀 잘 되었냐?”고 수시로 물었지만 나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라고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을 때 “무엇을 도와드리면 돼요?”라고 묻기에 나는 작심하고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 때 남북선수단 동시입장을 제안하고 있습니다”라고 꼭 집어 말했다. 그랬더니 김 위원장은 “그것 말고 남북이 합해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스포츠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잠시 생각하다 “탁구입니다”라고 답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직후 장웅 IOC 위원 일행이 도착하여 정식교섭이 시작되었다. IOC는 오륜기 뒤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들자고 제안했는데 북쪽에서 통일 반대 분위기를 준다면서 반발했다. 또 사마란치는 ‘Thank you IOC’라는 팻말을 들자고 제안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그래서 결국 국기는 한반도기로 낙착됐고 국호는 코리아로 정해졌다. 모두 내 뜻대로 된 것이다. 그리하여 50년 만에 남북선수단이 시드니 올림픽 주경기장에 나란히 같이 들어오게 됐고 전 세계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리고 남북이 시드니 올림픽 기간 중 서로 응원하고 방문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남북의 화해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막판협상이 성공한 직후 IOC 총회가 열렸고 공동입장에 대한 공식발표가 있었는데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우리(한국)는 발언을 못하게 하고 사마란치가 발표를 했다. 남북이 50년 만에 하나가 된 데는 역시 사마란치의 도움이 컸다. 동시입장이 성사된 일주일 후 북한 NOC가 협력기금 100만 달러를 요청해왔다. 예산도 없고 해서 시드니를 떠나기 전에 내가 50만 달러를 마련해(국고가 아님) 전달했는데, 이 일로 인해 후에 노무현 정부 때 횡령으로 몰리고 말았다. 명목은 허가 없이 주었다는 것이었다.
▲ 2001년 스위스 로잔 IOC본부에서 모인 집행부. 사마란치, 필자 등이 보인다. | ||
2003년 프라하 IOC 총회에 갔다. 그때는 2010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우리에게 제일 큰 과제였다. 여기에는 노무현 대통령 대신 고건 총리, 이창동 문광장관, 이연택 KOC 위원장, 이건희 박용성 IOC 위원, 김진선 강원도지사, 공로명 평창유치위원장 등 수백 명이 그동안의 활동을 바탕으로 몰려갔다. 국회에서도 김용학, 김학원, 함승희, 최돈웅 의원 등 평창특위위원들이 다 참석했다. 참고로 노 대통령은 내게 “가야 하느냐?”고 조언을 구했는데 내가 “꼭 (평창이) 된다는 보장이 없고 또 실패할 경우 다른 나라와 달라 정치적 부담이 클 것 같다”며 만류했다.
프라하에 도착하니 김진선 강원지사가 내게 “부위원장 출마를 포기할 테니 평창을 찍어달라고 호소해달라”는 요청해왔다. 고건 총리도 조찬에 초청해서 같은 부탁을 했다. 하지만 현실성이 없는 얘기였다. 이런 호소가 IOC 내에서 통할 리도 없거니와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한국식 정서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IOC 부위원장 선거는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결정 다음에 있는 것이고 나는 이미 4년 동안(1992~1996년)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집행위원도 8년이나 해서 부위원장 타이틀을 다시 다는 것은 큰 의미도 없었다.
이런 차에 사마란치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갔다. 이때 본부호텔 7층은 완전히 IOC 위원용으로 차단되어 있어 외부인사는 특별히 허가가 있기 전에는 올라올 수 없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마란치는 내게 “이번에는 당신이 아무리 힘을 써도 (평창이) 밴쿠버를 이기진 못 할 것이다. 그러나 2등은 꼭 해야 한다. 3등은 안 된다. 2등도 주목받는 2등을 해야 한다. 그 다음에 부위원장에 출마해서 당선하면 힘이 생기고 2007년 과테말라 IOC 총회에 가서는 평창이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는 조언을 했다. 그래서 고건 총리의 생각과 부위원장 선거 불출마 요청을 이야기했더니 사마란치는 자기가 11시에 고건 총리를 만나게 돼 있으니 설명하겠다며 맡겨달라고 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사마란치는 고건 총리에게 오랫동안 설명을 했지만 고건 총리는 마땅치 않아했다고 한다. 예상외로 1차에 잘츠부르크가 떨어졌다. 2차 투표에 들어가기 전에 아메드 OCA 회장과 마리오 바스케스 라냐 ANOC 회장이 2차에서는 평창이 안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더니 3표 차이로 밴쿠버가 이겼다. 비록 패했지만 평창의 선전에 세계가 놀랐다. 나는 예상하던 바라 만족하고 그 다음날 아침 총회에서 지원에 감사하며 열심히 준비해서 4년 후에 재도전해 서울 올림픽처럼 훌륭한 올림픽을 치르겠다고 연설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다. 그리고 대표단 호텔에 전화를 걸었더니 회의 중이라고 외무차관이 전화를 받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 정도 성과가 나왔으면 기뻐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
▲ 사마란치 위원장 부부와 필자 부부. | ||
그날 오후 부위원장 선거에서 나는 로게가 미는 노르웨이의 하이버그를 57 대 43으로 누르고 다시 부위원장에 당선돼 힘의 기반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하니 이상한 소리, 즉 필자가 방해를 놓아서 평창이 밴쿠버에 졌다는 중상모략이 들렸다. 김용학 의원이 앞장서더니 강원도에서 버스 100대를 동원해 여의도에 와서 나의 화형식을 하기도 했다. 김진선 강원도지사 쪽에서 이 비용으로 2억 원을 지원하고 심지어 인원동원이 여의치 않자 버스에 절반씩 사람을 태웠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이때 사마란치 위원장은 즉시 그렇지 않다는 성명서를 <코리아헤럴드>에 보냈다. 물론 달아오른 국내의 냄비여론을 진정시키는 데는 큰 소용이 없었다. 며칠 전에 김진선 지사로부터 신년 인사전화가 왔다. 밴쿠버 올림픽 후에 찾아뵙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 그런 짓만 안했으면 이미 동계올림픽은 따가지고 와서 김 지사가 조직위원장이 되어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사실 평창 동계올림픽은 나의 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2007년 과테말라 IOC 총회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갔고 이건희, 박용성 IOC 위원은 물론 유치위의 한승수 위원장, 김진선 강원도지사, 김정길 KOC 위원장, 청와대의 변양균, 오지철, 이광재 등 국회의원 수백 명이 “(평창이) 된다”는 확신을 갖고 몰려갔다. 그러나 ‘선거와 운동경기는 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는 속설대로 푸틴을 앞세운 러시아의 소치가 4표 차이로 평창을 제쳤다. 2003년에 사마란치가 생각한 전략대로 안 한 대가였다.
과테말라 IOC 총회 전에 오지철, 이광재 위원을 만났는데 49표는 확보했다기에 “그럼 30표는 나오겠다”고 했다(실제로 과테말라의 1차 투표에 36표가 나왔다. 2003년 프라하에서는 1차에서 51표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에서는 내게 “오지는 말고 팩스와 전화로 도와주고 팩스카피를 청와대 상황실로 보내라”고 했다. 또 8·15 때는 사면을 꼭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IOC 총회 전에 사마란치로부터 전화가 왔다. “과테말라에 오느냐”고 물었다. 안 간다고 했지만 사마란치는 수차례 되물으며 다짐을 받았다. “안 온다면 됐다. 혹시 왔다가 또 안 되면 당신한테 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과테말라 IOC 총회가 끝나고 <중앙일보>의 신동재 부장이 “평창이 지난번에는 김 위원이 있어서 안 됐고 이번에는 김 위원이 없어서 안 됐다”는 자조 섞인 말이 돈다고 보도했다. 영국의 대기자 데이비드 밀러는 “지난번에 한국정부가 김 위원을 공격한 것 때문에 여러 IOC 위원들이 (평창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썼다.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