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진원지는 이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었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재계 고위 인사들이 이따금 이용한다는 바로 그 특실. 바와 부속실까지 딸려 있는 이 특실에선 인터넷과 팩시밀리, 전용전화와 프린터 정도는 기본 설비. 서비스 전담직원까지 배정돼 투숙객을 ‘황제’처럼 받든다.
하지만 실제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이용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객실의 하루 이용료가 1백50만원대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호텔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임봉석씨(가명ㆍ37)의 경우는 ‘예외’였다. 그는 무려 1년여 동안이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묵었던 것으로 밝혀져 수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과연 임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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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 한 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기사와 관련없음. | ||
아내와 어린 딸까지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 잦은 이직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버거웠던 탓일까. 지난 2000년 7월께 그는 급기야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기에 이른다.
의사가 권유한 치료법은 당분간 휴식을 취하면서 요양하라는 것. 임씨는 그때부터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자신만의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임씨 가족 앞에 ‘천국 같은 호텔생활’이 처음 펼쳐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임씨는 그때 ‘가족과 함께 요양하며 사업구상을 하러’ 부산 해운대의 모 특급호텔을 찾았다고 한다. 물론 처음엔 전망 좋은 일반 객실을 택했다. 얼마간 지냈던 호텔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임씨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호텔에서 지냈던 나날을 잊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면 코발트빛 바다가 그림같이 펼쳐지는 깨끗한 객실. 근사한 호텔 칵테일바와 수영장, 그리고 최고급 사우나가 완비된 작은 천국.’
특급호텔이 안겨주는 이같은 안락함은 임씨의 뇌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급기야 임씨는 그 해 11월부터 아예 가족과 함께 이 호텔 ‘귀빈실’에 들어가 살기로 결심했다. 마침 귀빈실에선 인터넷과 팩스 사용이 자유로웠기에 사업준비도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임씨가 준비한 일이란 국제어음거래소와 부동산 리츠 관련 인터넷 사업.
일반 객실에서 출발해 귀빈실까지 ‘진출’할 때쯤 임씨 가족의 배포는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부터 이들은 아예 특급호텔 최고의 객실이라 일컬어지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입성하게 된다. 호텔측 또한 더 비싼 객실을 사용하겠다는 이들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물론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도 잠깐씩 묵고 가는 최고급 객실에 장기투숙하겠다는 임씨 가족에 대해 호텔 관계자들이 궁금증을 품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임씨는 “벤처기업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며 알쏭달쏭한 미소만 던질 뿐이었다. 몇몇 호텔 직원들은 ‘철통 보안’을 요구하는 임씨를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요원쯤으로 짐작하기도 했다.
호텔측이 ‘정체불명’의 임씨 가족에게 칙사대접을 했던 것은 임씨 부인이 갖고 있던 플래티넘카드 때문이기도 했다. 전체 신용카드사용자의 0.3%에 불과한, 최고의 부유층에게만 발급되는 특급 신용카드의 소유자였던 것. 임씨 부인은 당시 시중은행에 4천만원을 예치해 놓고 이 카드를 발급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경찰에 따르면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무직자인 임씨 부부가 플래티넘카드를 사용할 수 있었는지도 하나의 미스터리인 셈.
아무튼 처음 몇 개월 동안 임씨 가족은 지니고 있던 돈과 플래티넘카드를 이용해 거액의 객실료를 지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별다른 벌이 없이 하루가 다르게 쌓여만 가는 숙박료를 해결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한동안은 여기저기서 발급받은 신용카드 10여장과 대출금으로 급한 불을 껐다. 심지어는 객실 전담직원의 신용카드까지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객실료에 카드대금마저 쌓이다보니 임씨 가족은 더 이상 빚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숙박료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게 지난해 말. 카드 ‘돌려막기’는 결국 연쇄적인 연체사태를 불러왔다.
임씨 가족의 밀린 객실료만 약 1억원(장기투숙자로 60% 할인된 금액)에 이른 지난 3월 호텔측도 이들이 정보기관 관계자도 벤처사업가도 아닌 ‘막가파 투숙객’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정작 웃지못할 일이 벌어진 것은 그 다음.
호텔측은 그제서야 밀린 객실료를 변제할 것을 재촉했고, 이들 가족은 오히려 오래 머문 대가로 송별파티를 열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속으로 끙끙 앓는 것과는 달리 결국 임씨의 딸에게 고깔모자까지 씌워주며 ‘어색한 파티’를 열어야 했던 직원들. 반면 임씨 가족은 이 순간까지 자신들이 VIP임을 과시했다.
사실 임씨 가족은 그날 이후 최고급 객실에서 나가고 싶어도 맘대로 나가지 못할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호텔이 지난 4월초 이들을 고소했기 때문. 결국 호텔측은 ‘5월31일까지 밀린 객실료를 갚겠다’는 각서를 받아내고 이들을 내보내게 된다.
하지만 일정한 직업도 없던 임씨 가족에게 한꺼번에 목돈을 마련할 길이 있을 리 만무했다. 뒤늦게 밝혀진 임씨 가족의 서울 집 또한 전세 2천만원짜리 단칸방에 불과했다. 결국 임씨는 약속한 기일까지 객실료를 지불하지 못하고 ‘사기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 조사관조차 풀지 못한 한 가지 수수께끼는 왜 임씨 가족이 ‘막가파’식으로 최고급 객실에서 장기간 머물렀는가 하는 점. 임씨는 이에 대해 끝까지 “일만 잘 풀렸으면 갚을 수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