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주도에서 벌어진 기묘한 송사는 바로 이 같은 황당한 관계에서 비롯됐다. 60대 동거녀의 결별요구에 앙심을 품고 동거녀를 에이즈 환자라고 비방하는 전단지를 배포하는가 하면 그녀의 집에 불을 지른 혐의로 기소된 30대 미혼남이 실형을 선고받은 것.
제주지법(재판장 박종문 부장판사)은 지난 4월30일 자신과 동거하던 서자옥씨(가명·62·여)가 관계청산을 요구하자 서씨의 집에 불을 지른 혐의(현조건조물 방화죄 등)로 기소된 오상록씨(가명·33)에 대한 1심 공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지난해 6월 중순 제주도 ○○동 일대에는 정체불명의 전단지가 나돌기 시작했다. 문제의 전단지는 ○○동 주민들의 주택 현관에서도, 우편함에서도 불쑥불쑥 출현했다. A4 용지에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자옥은 더럽고 추잡한 병, 에이즈 환자입니다. 가야금 하면서 창녀로 몸팔아 살고 있고, 지금도 유홍규와 연애하고 있어요. ○○동 사람들은 에이즈 조심하세요. 당장 소문을 내서 다른 지방으로 떠나게 하세요.’
전단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서자옥씨는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올해 62세의 독신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사설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때 전국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이름을 알렸던 그녀였다. 지역을 빛낸 인물로 뽑혔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랬던 서씨가 ‘에이즈 환자’로 전락해 전단지에 오르내리게 된 연유는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99년 서귀포시 한 횡단보도를 지나던 서씨는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던 오상록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이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비록 나이가 30년 가까이 차이났지만 무엇에라도 홀린 듯 이따금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이로 발전했다.
오씨는 혼자 살고 있던 서씨에게 가끔씩 찾아와 가재도구를 수리해주거나 이삿짐을 날라주는 등 허드렛일을 봐줬다. 한편 서씨는 이런 오씨가 딱히 거처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이런 관계를 이어오던 두 사람은 지난해 2월부터 아예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일정한 거처가 없던 오씨는 주민등록 주소지까지 서씨의 집으로 옮겨 놓았다. 서씨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오씨를 아들처럼 생각했다. 오씨 역시 그런 서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 피고 오씨가 뿌려댔던 전단지. | ||
60대 할머니와 30대 총각, 이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 관계는 그러나 지난 5월말 서씨의 일방적인 관계 청산 선언으로 막을 내렸다. 환갑이 넘도록 처녀로 살아온 서씨에게는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를 이어나갈 만큼의 열정이 없었던 것.
‘다시는 내 집에 찾아오지 말라’는 서씨의 말을 듣는 순간 오씨의 뇌리에는 ‘이 늙은 ×이 드디어 옆집 유가하고…’라는 생각이 스쳤다.
유가란 서씨 옆집에 살고 있던 유홍규씨(가명). 갑작스런 서씨의 결별요구에 평소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옆집 사람 유씨와의 관계를 의심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이에 맞선 오씨의 대응방식은 너무나도 간결했다. 그저 서씨의 험담으로 일관하는 것뿐이었다. 서씨의 ‘변심’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던 셈이었다. 이를테면 같은 해 7월8일의 경우. 이날 피해자 서씨는 집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집밖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야, 서자옥! 4개월 동안 몸 바쳤는데 그동안 성관계 해 준 돈은 내놔야 할 것 아니냐.”
그 다음날, 역시 서씨의 집 앞에서 자리를 잡은 오씨는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 이 ×××야. 옆집 유홍규하고 하루에 성관계를 세 번씩 하는 ×야.” 물론 앞서 소개한 문제의 전단지도 오씨의 작품이었다.
사태가 이쯤되자 서씨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같은 해 말 서씨는 오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게 이른다. 우연히 만나 동거까지 하게 된 두 사람의 관계는 이 고소건을 계기로 마침내 파국으로 치달았다.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고소 취하만을 요구하던 오씨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휘발유를 들고 서씨의 집을 찾아가 불을 지른 것. 그러나 오씨가 불을 지르는 사이 집 안에 있던 서씨는 급히 몸을 피했고, 되레 오씨 자신이 심한 화상을 입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붙잡힌 것도 당연했다.
검거된 직후 오씨는 “내가 불을 지른 것이 아니라 서씨와 다투는 과정에서 우연히 일어난 화재”라고 주장했다. 휘발유를 가지고 간 것은 맞지만 이는 서씨의 집 가재도구에 부착된 쇠붙이의 녹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었다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화재 발생 시각인 오후 8시에 자신을 문전박대하던 서씨의 집에 창문을 깨고 들어간 점을 들어 오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결국 화상을 입은 몸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교도소행에 직면한 오씨. 세대를 뛰어넘은 사랑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비뚤어진 성격이 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