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라미드식으로 수천억원대의 위조수표를 유통시킨 조직의 꼬리가 잡혔다. 사진은 명동 사채시장으로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 | ||
경찰청 외사3과는 지난 9월26일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표를 위조해 유통시키려 한 혐의로 배아무개씨(47) 등 7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정치권 비자금’ 등의 명목을 붙여 위조수표를 시중에 유통시키려 한 것으로 밝혀져 의문을 남기고 있다. 경찰청이 이번 사건에 대해 본격 수사에 나선 것은 지난 6월부터. 경찰 관계자는 “다단계 조직을 통한 대규모 위조수표 유통이 시도되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수사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이 압수한 수표의 액면가는 5천8백억원대. 5백억원짜리 자기앞수표 7장을 비롯해 4백50억원짜리 수표 1장, 1백억원짜리 수표 7장 등이다.
이들은 이 수표를 특수기기를 사용해 정밀하게 위조했다. 액수도 액수지만 그 수법 또한 놀라울 정도로 지능적이라는 게 경찰의 분석. 이들은 위조수표의 최초 유포자를 보호하기 위해 전형적인 피라미드 수법을 동원했다. 요컨대 공급책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면 수수료를 주겠다는 식으로 알선책을 끌어들이고, 수표를 건네받은 사람은 다시 수표를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찾아 수표를 건넨다.
이들은 이 같은 수법으로 10단계의 손을 거쳐 위조수표를 세탁했거나, 세탁하려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최초 1차 알선책이 공급책에게 받기로 했던 50%의 수수료는 10단계를 거쳐 내려오면서 3%대까지 떨어졌다. 1백억원 위조수표 한 장을 현금으로 바꿔주면 최초 공급책은 50억원만 챙기고 나머지 50억원은 알선책들에게 돌아가는 수수료가 된다는 것. 최종 알선책은 대략 3억원을 수수료로 챙긴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유통을 시도하는 과정에 대학교수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타깃으로 집중 접촉했다. 경찰 관계자는 “대학교수를 포함해 의사·기업가·약사 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며 “특히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높이려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현재 붙잡은 조직책은 꼬리에 불과하다는 판단이다. 위조수표단의 몸통은 어딘가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이라는 게 경찰측의 설명. 경찰 관계자는 “현재 10단계 이상 조직의 전이가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수표 유통에 관여된 인원만 수백여 명이고, 이 중에는 상당수의 사회지도층 인사가 더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경찰이 이 같은 추측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 피라미드 조직이 유통시킨 것은 위조수표뿐만이 아니기 때문. ‘대한민국임시정부 채권’ ‘양도성예금증서(CD)’ ‘대만독립지원 달러’ 등의 다양한 유가증권을 유통시키려 한 사실도 밝혀졌다는 것이다.
특히 양도성예금증서의 경우 보통 부유층이 세금을 물지 않고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탓에 일부 상류층에서도 이들의 범행에 가담했을 확률이 높다는 게 경찰측의 추측이다. 하지만 경찰 수사가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된 데다가, 조직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급책과 알선책 두 사람이 만나 1 대 1 거래를 해온 것. 따라서 사건에 연루돼 경찰 조사를 받는 사람들조차 두 단계 이상을 거치면 조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이들은 최초 거래시 따로 보안 각서까지 받았다고 한다. 공급책이 알선책에게 수표를 넘길 때 ‘수표에 대한 모든 내용을 일체 외부에 공개하지 않겠다. 이를 위반할 시 적절한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따로 받아둔 것으로 드러났다.
위조범들은 “정치권에서 은밀하게 돌고 있는 비자금이기 때문에 보안이 필수적”이라는 말로 연루자들을 속였던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극비리에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경찰은 현재 위조단의 몸통에 대해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항간에는 광주의 한 유명 조폭 조직이 이번 사건에 깊숙이 관여돼 있다는 소문도 있으나, 아직 뚜렷한 혐의점은 찾지 못한 상태.
경찰은 이와 관련해 지난해 2월 한 은행 직원이 2백여 장의 백지수표를 가지고 달아난 사건을 주시하고 있다. 경찰은 이 은행원이 가지고 간 백지수표가 위조수표로 둔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때문에 이 은행원의 행적을 집중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두고 공개수사를 할 것인지, 현재와 같이 비밀수사로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중이다. 비밀수사를 계속할 경우 자칫 피해자가 늘어날 수 있고, 공개수사를 하면 주범들이 몸을 숨겨 사건의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경찰은 일단 은행 등 공기관을 통해 수상한 수표를 발견하거나 수표를 처분해줄 것을 제의 받으면 은행에 조회해 보거나 경찰에 신고해줄 것을 당부했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미처 위조수표인 줄 모르고 범행에 가담한 사람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사태 파악이 안된 일부 범행 가담자들은 경찰에 붙잡힌 뒤 “그게 무슨 수표인 줄 아느냐. 3공 때 실세들이 은닉하고 있던 정치 비자금이다. 얼마 안 있어 곧 규제가 풀릴 것”이라며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중 몇몇은 “당신들 지금 실수하고 있다. 곧 청와대나 국정원에서 우리들을 빼주기 위해 연락을 할 것이다”며 오히려 수사 관계자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한다.
이석 프리랜서 zeus@newsban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