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 ||
이들의 수법을 보면 마치 “정치권도 대선을 이용해서 한몫 챙기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이 뭐가 있느냐”고 항변하는 듯하다. 이들 사기단은 정교한 기계로 주유 상품권 27억여원어치를 위조해서 “비밀리에 대선자금을 모으고 있다”고 속여 이를 팔아 치웠다.
이들은 대선자금이라는 은밀함을 십분 활용, 피해자들에게 “비밀리에 수행하는 일”이라며 입단속을 시키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또한 피해자들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 고급 외제차뿐 아니라 수십 명의 사설 경호요원까지 동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쯤되면 ‘차떼기’나 ‘책포장’을 동원한 재계의 수법을 무색케할 만하다.
“대선이 해마다 오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수선할 때 한탕하고 튑시다.”
지난 12월19일 검찰에 구속된 ‘대선자금 사기단’의 김아무개씨(38) 등 일당 8명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이들은 대선 직전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위조 주유상품권을 판매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조직원 대부분이 출판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유상품권 위조는 ‘식은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단 의견이 모아지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전북 정읍의 한 인쇄소를 빌려 ○○정유 주유상품권(액면가 5만원) 7만2천 장을 위조했다.
외국에서 들여온 고성능 감별기를 통해 위조 여부가 발각될 수 있는지의 확인작업까지 마치는 치밀함을 보였다.
감별기에서도 문제없이 통과될 정도로 정교한 위조에 성공한 이들은 곧 상품권을 살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조직원이 구성된 지 한 달째인 지난해 11월.
마침 평소 안면이 있던 상품권 업자로부터 중소기업 대표인 김아무개씨(50)를 소개받게 된다. 당시 김씨는 상당히 튼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지역 유지였다. 더군다나 세상 물정에 다소 어두워 사기극을 벌이기에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때부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기극이 시작된다. 이들은 우선 자신을 대선 유력 후보 A씨 캠프의 ‘비호 조직원’으로 소개했다. 이들은 “대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A후보의 배후 그룹에서 마련한 주유권을 비밀리에 판매하고 있다. 대선자금의 비밀스런 성격탓에 어쩔 수 없이 액면가보다 10% 싸게 내놓는 것이니 좋은 기회”라고 김씨를 유혹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A후보의 ‘비호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수십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다. 소형 수신기를 착용한 경호원 차림의 남자 수십 명을 항상 고급 외제차에 태우고 거래장소에 나타나곤 했던 것. 이들은 사설 경호업체를 통해 일당을 주고 빌린 인력이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거래 도중 경호원 차림의 경호업체 직원들이 무전으로 통화를 하는 등 실제와 같은 상황을 연출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심지어 거래에 앞서 자신들이 준비한 감별기를 통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치밀함까지 선보였다. 상대가 속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상황을 몰고간 것.
김씨가 호감을 보이자 이들은 ‘결정타’를 날렸다.
“비밀리에 수행하는 일이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절대 안된다”며 김씨에게 겁을 준 것. 거래를 마친 후 “선거에 당선되면 후보께서 반드시 인사를 하실 것이다. 잘하면 한자리가 마련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애프터 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이들의 전략은 완벽하게 주효했다. 상대에게 신뢰감을 주었을 뿐 아니라 경찰에 신고를 막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김씨는 ‘장밋빛 환상’을 꿈꾸며 그 자리에서 바로 거래에 응했다. 김씨가 내놓은 돈은 수표 20억여원과 현금 7억원이었다.
이 사기극이 드러나게 된 것은 거래가 이뤄진 지 10여 일 뒤인 지난해 12월9일. 김씨가 문제의 주유상품권에 대해 ‘혹시나’하는 마음에서 발행처인 한 정유회사에 직접 조회를 의뢰했던 것. 그러나 일련번호가 전혀 다른 것으로 확인되자 눈앞이 캄캄해진 김씨는 혼자 속앓이를 하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 수사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김씨는 검찰에서 “위조된 주유권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막대한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다는 생각에 거래에 응한 것인데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피해자인 김씨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설명이다. 서울지검 형사7부의 김종근 검사는 “피해자가 구입한 주유권에는 발행처가 ‘○○정유’로 게재돼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정유회사는 이미 이름을 바꾼 뒤였다”며 “이런 기본적인 사항만 알고 있었어도 그렇게 어이없게 속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사기단 일당 8명 중 사실상 주범격인 한 명은 아직 검거되지 않은 상태. 검찰이 우려를 표시하는 것도 이 부분. 김 검사에 따르면 김씨 일당의 직업이 대부분 출판업자였으나, 사업이 실패로 끝나자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 범행을 모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검사는 “아직 검거되지 않은 주동자가 위조 전문가인 만큼 혹시 도피중에 또다른 제2, 제3의 유사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각별한 조심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