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흉기를 든 한 남자가 나타나 야수처럼 덤벼든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과 배, 허벅지를 무참히 찔러버린다. 여자는 저항도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의 칼은 계속 여자의 몸을 파고든다. 그리고 남자는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올 들어 서울 서남부 지역인 대림동, 고척동, 신림시장, 보라매공원 등지에서 잇따르고 있는 부녀자 연쇄 피습사건을 ‘재구성’한 장면이다(사건 일지 참조). 반경 4km 내의 거리에 있는 이들 지역에선 공교롭게도 지난 2월부터 5월까지 4건의 부녀자 살인 및 살인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범인의 윤곽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수사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상태다.
경찰이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금품 피해와 성폭행의 흔적이 없다는 사실뿐. 범행 동기가 불분명하고 수법이 잔혹해 ‘묻지마 살인’이라 불릴 정도다. 대체 누가 왜 불특정 여성들의 목숨을 노리는 걸까.
경찰 수사에 뚜렷한 진척이 없자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공포 섞인 ‘괴담’까지 번지고 있다. “서울판 ‘살인의 추억’이 되는 것 아니냐”, “범인이 하얀색 옷을 입은 여자만 죽인다”, “목요일에만 살인한다”, “범인이 특정 버스노선을 따라 움직인다” 등의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
그러나 이런 소문이 전혀 근거 없는 ‘괴담’으로만 그칠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들 4건의 사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유사점이 발견된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지만 우연의 일치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도 적지 않다. 4건의 사건에서 발견되는 공통분모를 통해 베일 속 범인에게 다가가보자.
우선 꼽을 수 있는 유사점은 ‘모호한 살해동기’다. 4건의 사건 모두 뚜렷한 범행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피해여성들에게서도 금품 피해나 성추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피해여성들이 딱히 원한을 살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4건의 피습사건 중 지난 2월 신림시장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은 피해자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경우.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피해자 박아무개양(18)이 피습 당시 “돈을 줄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범인은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나”라며 무참히 흉기를 휘둘렀다고 한다.
4월에 일어난 고척동 사건의 경우엔 피해자 김아무개씨(20·여대생)가 바로 집 앞에서 여러 차례 흉기에 찔려 살해됐다는 점 때문에 ‘원한관계로 인한 면식범의 범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맡은 구로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주위에 원한을 살 만한 사람도 일도 없었다. 김씨가 이제 스무 살 학생인데 무슨 원한을 맺었겠나”라며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지난 5월 보라매공원 주변에서 벌어진 피습 사건에서도 뚜렷한 살해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피해자 김아무개씨(22·여대생)는 남자친구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걸어가던 중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의해 가슴, 배, 옆구리 등을 흉기로 찔렸다. 김씨의 남자친구는 김씨가 “나, 찔렸어…”라고 휴대폰으로 알려와 그 길로 공원 주변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 보라매공원 여대생 피살 현장(아래쪽)과 대림동 사건 제보자를 찾는 현수막. | ||
두 번째 유사점은 네 사건의 범인이 사용한 흉기가 동일한 모양의 칼, 그 중에서도 부엌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경찰은 피습 당한 여성들이 입은 상흔의 길이와 깊이 등으로 볼 때 범인이 휘두른 흉기는 칼 종류이며, 그 중에서도 폭이 넓은 부엌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대림동 사건의 살해현장에서 54m 떨어진 곳에선 범인이 버리고 간 것으로 보이는 길이 30cm가량의 피 묻은 부엌칼이 발견됐다. 또한 숨진 다른 여성들의 몸에 난 상처의 길이가 모두 4cm이상이어서 경찰은 범인이 폭이 넓은 부엌칼을 흉기로 사용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세 번째는 피습 당한 여성들이 대부분 상반신, 그것도 가슴과 배를 집중적으로 흉기에 찔렸다는 점.
고척동 사건의 피해자 사체 부검 결과, 범인은 김씨를 뒤에서 제압하고 정확히 가슴을 흉기로 3번 찔러 치명상을 입힌 뒤 배 등 다른 부위를 수 차례 더 찌른 것으로 나타났다. 피살당한 다른 피해여성들과 목숨을 건진 여고생 박양의 경우에도 범인이 집중적으로 찌른 부위는 가슴과 배였다. 경찰은 상흔의 위치와 각도로 보아 범인이 오른손잡이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네 번째 유사점은 범인이 항상 비 오는 날 새벽 시간을 택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피습사건 4건은새벽 2~5시 사이에 일어났고 그 중 3건은 2~3시 전후에 이뤄졌다. 이 시간대는 인적이 드물어 경찰은 이렇다 할 목격자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또한 기자가 기상청 자료를 확인한 결과 사건이 일어난 날에는 어김없이 서울 시내에 비가 내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새벽 시간에 비까지 내렸는데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도 숨은 목격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한편 보라매공원 사건을 제외한 3건의 피습사건이 목요일에 발생해 인근 주민들 사이에선 ‘비 오는 목요일 새벽에 살인자가 나타난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연쇄 피습사건의 범인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신림시장 사건의 피해자인 여고생 박양은 범인이 40대 남성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고척동 사건으로 숨진 김씨의 집 인근에 사는 한 주민은 사건 발생시간에 40대 남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만약 4건의 피습사건이 동일범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면 몇 가지 유사점으로 보아 범인은 ‘신림·고척·대림동 일대의 지리를 잘 아는 40대의 오른손잡이 남자로 여성에게 적개심을 지닌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경찰은 세간에서 떠돌고 있는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 가능성에 대해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으려는 눈치다. 한 수사 관계자는 “몇 가지 유사점이 나타난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본다. 물론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고 있지 않지만 범행수법이나 여러 정황을 감안하면 현재로선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피습사건의 범인(들)은 현장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용의자의 지문 등 사건을 풀어나갈 만한 단서가 별로 없어 수사도 아직은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한 경찰 간부는 “관내에서 발생한 유사한 사건, 정신질환자 등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면서 “범인을 검거할 때까지 인근 경찰서의 3백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공조수사를 펼칠 계획이다”고 밝혔다.
과연 경찰이 잇따른 피습사건을 둘러싼 의혹들을 속 시원히 풀어줄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 얼굴 없는 범인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