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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연수생으로 97년 5월에 입국해 불법체류자가 된 채씨는 두 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된 상태. 지난해 8월28일 자신이 일하는 경기 김포시의 모 업체 기숙사에서 조선족 출신 ‘노래방 도우미’ 김아무개씨(40)와 화대로 말다툼을 하다 김씨를 목졸라 살해하고 현금과 신용카드를 빼앗은 뒤 사체를 마대 자루에 담아 인근 배수로에 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채씨는 20일 후인 지난해 9월17일 오후 10시께 조선족 출신 다방종업원 임아무개씨(41)와 화대로 말다툼을 하다 임씨를 목졸라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사체를 인근 배수로에 버린 혐의도 받고 있다.
채씨는 당초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다가 검찰 조사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러나 채씨는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검찰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 사건 당일 피해자들은 만난 적 없다”며 줄곧 혐의를 부인해왔다.
그러나 1심과 2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통화내역 조회 결과 피해자들이 살해될 무렵 모두 채씨와 통화한 사실이 있고, 특히 지난해 7월부터 꾸준히 김씨, 임씨와 전화연락을 해온 채씨가 피해자들이 살해된 이후에는 한 번도 통화한 사실이 없다는 점, 또한 피해자들의 유류품 중 일부가 채씨의 숙소 근처에서 발견된 점을 들어 채씨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채씨의 검찰 자백 외에 직접적인 증거나 목격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다시 심리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대법원은 채씨의 살해동기, 피해자들의 당일 행적과 신용카드의 행방을 문제 삼았다.
우선 살해동기에 관해 대법원은 “‘피해여성들이 모두 화대로 20만원을 요구하여 말다툼을 하던 중 채씨가 심한 모욕을 느껴 살인했다’고 하나 일반적으로 그 범행동기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채씨의 국선변호인 유병옥 변호사(48) 역시 “단순히 화대 때문에 20일에 걸쳐 두 명을 살해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 사건을 담당한 김포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채씨가 옛 애인의 배신으로 실연을 당한 후 옛 애인과 비슷한 직업을 가진 피해여성들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채씨는 2년 정도 사귀던 조선족 출신 애인 신아무개씨(40·티켓다방 종업원)가 지난해 6월 다른 남자와 도망간 후 또 다른 티켓다방 종업원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해왔다는 것.
숙련된 용접공인 채씨는 당시 능력을 인정받아 월급으로 3백5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번 돈 2천여만원을 신씨에게 쏟아부을 정도로 채씨는 정성을 다했지만 신씨가 자신을 떠나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한 경찰관은 “채씨는 신씨가 자신을 안 만나주고 계속 피하자 신씨의 동생에게 전화해 ‘신씨를 죽여버리겠다’며 협박까지 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채씨가 신씨와 헤어진 것이 범행의 직접적인 동기는 아니라도 간접적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로 대법원이 의문을 제기한 것은 피해자들의 사건 당일 행적이다.
김씨의 경우 2003년 8월27일 새벽1시에 노래방을 나간 후 사망 추정 시간에 이르기까지 23시간 동안의 정확한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고, 임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2003년 9월15일 저녁 7시께 다방을 나간 후 사망 추정 시간에 이르기까지 약 26시간 동안의 구체적인 행적이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피해자들이 이 시간 동안 채씨 외에 제3자와 통화한 내역도 있어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보강 조사를 하라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피해자들이 매일 다방이나 노래방을 출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업소의 연락이 오면 손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출장을 나가기 때문에 정확한 행적을 밝혀내기가 어려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대법원이 심리를 보충하라고 한 부분은 피해자들의 신용카드에 관한 것이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채씨 주변 사람들에 대한 조사에서 ‘채씨가 검은색과 황금색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경찰은 채씨가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를 소지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해 이 신용카드를 피해자들의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문제의 신용카드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김포경찰서 관계자는 “채씨가 검거 3일 전에 신용카드를 소각해 실제로 찾아내진 못했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경찰은 주변사람들의 진술만을 근거로 이 신용카드가 피해자들의 것이라고 추정한 셈이 됐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피해자들이 실제 검은색과 황금색의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하였는지 여부와, 또 마지막 사용날짜와 사용자 등을 심리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결국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을 심리하여 살펴보았다면 피고인의 검찰 자백의 신빙성에 관하여 원심 판결과는 달리 판단할 수 있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게 대법원이 내린 결론이다.
현재 검찰과 경찰은 대법원이 지적한 부분에 대한 보강 수사에 나선 상태. 그러나 채씨가 ‘살인범’이라는 수사기관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채씨가 애인의 배반 탓에 유흥가 여성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고 있었던 점이 범행의 간접적인 동기가 됐고, 채씨측 주장과는 달리 채씨가 범행을 자백할 당시 검찰의 가혹행위도 없었다는 게 수사 관계자들의 얘기다.
채씨는 과연 ‘부실 수사’로 인한 억울한 희생자일까, 아니면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는 교활한 살인자일까. 향후 고등법원의 심리 결과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