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그러나 놀랍게도 경찰의 사체부검 결과 이들 세 사람은 화재로 죽은 것이 아니라 흉기에 찔려 피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현장에 불을 질렀던 것. 경찰은 즉각 수사본부를 꾸리고 다각도로 수사를 시작했지만 사건 현장이 화재로 인해 훼손됐고 불을 끄는 과정에서 집안의 집기도 소방수에 쓸려나가 증거를 찾기가 어려웠다.
경찰은 숨진 전씨 남매와 함께 살던 어머니 박아무개씨(47)로부터 “도난당한 물건은 없다. 없어진 것은 딸이 기르던 애완견 4년생 시추뿐이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일단 이 사건을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했다.
특히 범인이 피살자들 중 전씨 남매에게 집중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는 점 때문에 주변인물들이 하나둘씩 용의선상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피살자들이 서로 다른 2개의 흉기에 의해 몸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드러나 범인은 최소한 둘 이상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가정 아래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놀랍게도 전씨 남매의 어머니 박씨와 박씨의 내연남이었다. 박씨는 사건이 발생하기 넉 달 전 전씨 남매 앞으로 보험에 가입해 보험수익자를 박씨 자신으로 해놓았는데 이것이 유력한 용의점이었다. 또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박씨는 피살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왔으나 그가 자리를 비운 40분 동안 피살자들이 변을 당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경찰 조사에서 박씨는 “그 시각에 신월동에 있는 내연남을 만나러 갔다”고 주장했다.
사건을 담당한 수서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처음엔 박씨와 박씨의 내연남이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알리바이가 완벽해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박씨의 내연남은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라 현실적으로 이들이 범행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 다음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오빠 전씨의 직장동료 A씨. 오빠 전씨는 A씨의 회사 공금 횡령 사실과 복잡한 치정관계를 잘 알고 있었고 여동생또한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A씨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경찰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 A씨가 오빠 전씨와 통화한 내역을 확보하고 수사력를 집중했다. 그러나 A씨 역시 범행이 일어난 시각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등 분명한 알리바이가 밝혀져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경찰은 “A씨가 전씨 남매를 살해할 정도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일까. 애초에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하나둘씩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자 경찰은 숨진 여동생 전씨가 기르던 애완견을 찾는 데 주력했다. 어쩌면 여동생의 애완견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일 수도 있기 때문.
경찰은 전씨 남매의 집 주변을 수소문한 끝에 일주일 만에 여동생 전씨가 기르던 애완견을 찾아냈다. 전씨의 애완견은 화재가 날 당시 놀라 집을 나갔는데 마침 전씨 남매 이웃집의 한 꼬마가 데리고 있었다. 경찰은 이 애완견을 데리고 사건 현장을 찾아갔다.
경찰이 예상했듯이 애완견은 현관문 앞에서 집 안으로 안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가 하면 여동생의 방 앞에서만 맴도는 등 이상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즉각 ‘동물언어 번역기’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시추와 몇몇 용의자들을 상대로 사상초유의 ‘대질심문’까지 벌였다.
한 수사 관계자는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이 피해자 애완견의 도움으로 해결된 적이 있어 수사팀도 시도해봤다. 주인의 피살을 목격한 애완견이 그 장면을 깊이 각인해 범인과 마주치면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근거로 용의자들과 대질심문을 벌였지만 성과는 없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시추의 경우 지능이 낮아 기억이 3~4일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고 한다. 실제로 여동생의 애완견은 용의자들에게 친근감을 보이는가 하면 수사관들을 보며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해 애완견과 용의자들의 대질심문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뚜렷한 수사 방향이 잡히지 않자 경찰은 다시 원점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 수사관은 “원한관계에 의한 계획적인 살인으로 보이지만 물증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놨다. 범행에 사용된 흉기도 피살자들의 집에 있던 부엌칼과 과도인 것으로 밝혀지는 등 실제로 범인이 현장에 남긴 물증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다.
그러나 최근 경찰은 이번 사건이 살인청부업자의 소행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수사본부의 한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흉기에 의한 살인일 경우 과다출혈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이 사건 피살자들의 몸에 난 5~6군데 상처는 모두 급소였다. 즉 피살자들은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목과 옆구리 등에 치명상을 입고 숨진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흉기를 사용한 수법으로 보아 범인은 소위 ‘칼질’을 할 줄 아는 전문가로 추정된다고 한다. 피살자들 주변에 칼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던 점으로 보아 이번 사건이 전문가에 의한 청부 범행일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것.
술에 만취한 오빠 전씨와 약혼남 김씨와 달리 사건 당일 여동생 전씨는 술 한 모금 하지 않은 상태여서 범인의 흉기를 피하기 위해 저항한 흔적이 사체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범인은 여동생 전씨를 완전히 제압한 후 급소만을 정확히 찔렀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누가 왜 청부업자를 시켜 이들 3명을 살해한 것일까.
한 수사 관계자는 “다각도로 다시 알아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사채 문제다. 전씨 남매가 사채업자로부터 수천만원을 빌려쓴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전씨 남매가 그 사채업자와 자주 다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혹시 사채업자가 청부한 자들에 의해 이들이 피살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라고 밝혔다.
경찰은 오랫동안 전씨 남매가 사채를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가 전씨 남매가 사채를 갚을 능력과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청부업자를 통해 보복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전씨 남매에게 돈을 빌려 준 사채업자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의 사채업자가 그렇듯 문제의 사채업자 또한 타인명의 휴대폰과 은행계좌를 이용해 추적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사채업자가 살인을 저지를 만한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 ‘제3의 범인’이 있을 가능성을 짚고 있다.
과연 삼전동 살인사건은 사채업자에 의한 청부살인인가, 아니면 경찰이 놓친 다른 주변인의 소행인가. 말없는 피해자의 애완견만을 남긴 채 사건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