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맨 위는 범행에 쓰인 것과 같은 경찰용 38구경 권총. 가운데는 범행 현장인 은행 지하주차장. 맨 아래는 사건 당일 현장에서 2백m 떨어진 건물 지하주차장에서 발견된 범행 차량. MBC-TV 촬영 | ||
차가 멈추고 은행직원 1명과 청원경찰 2명이 내린 뒤 3억원이 든 두 개의 가방을 옮기려는 찰라였다. 갑자기 괴한 두 명이 나타나 권총을 들이댔다. “꼼짝마” 한 명이 총을 겨누는 사이 다른 한 명이 돈가방을 뺏으려고 다가갔다. 그러나 국민은행 용전동지점의 김아무개 과장(당시 46세)은 돈을 뺏기지 않으려고 가방을 끌어안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김 과장은 괴한이 쏜 총에 가슴과 다리 세 군데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김 과장이 쓰러지자 당황한 괴한들은 현금이 든 나머지 가방을 놓아 둔 채 3억원이 든 가방만을 들고 검은색 그랜저에 올라타 황급히 사라졌다. 김 과장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내 숨지고 말았다.
피해자나 경찰이 가장 놀라워했던 것은 범인들이 권총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범행 직후에도 범인들이 권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또다른 범죄에 사용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과학수사팀의 감식 결과 총알은 경찰이 사용하는 38구경 권총 탄환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이 권총이 범행 3개월 전인 10월15일 새벽 0시10분 도난당한 경찰의 총기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당시 대전시 동구 송촌동 주택가 골목길에서 순찰중이던 노아무개 경사(당시 33세)가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한 뒤 실탄 4발, 공포탄 1발이 장전된 38구경 권총을 누군가에게 빼앗겼었다. 경찰 추정에 따르면 범인들이 현금 탈취 계획을 세우고 미리 총을 입수하기 위해 순찰중인 경찰을 덮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뺑소니범을 잡기 위해 경찰은 3개반을 동원해 수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권총을 뺏기 위해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 점으로 보아 범인들은 현금 탈취를 위해 상당히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를 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혹시 피해 은행 내부에 공범이 있을 가능성도 조사했으나 은행 내부 관계자의 관련성은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범인들이 복면도 쓰지 않은 채 맨얼굴을 드러낼 정도로 대담했던 점으로 보아 오히려 대전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경찰의 추리다.
또한 범인들이 여러 장소 가운데서도 보안이 취약한 지하주차장에서 현금을 강탈한 점으로 보아 범행을 위해 각 은행의 현금수송차량을 오랫동안 사전조사해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피해자들은 범인들이 ‘경기 2버 54△△’ 번호판을 단 검은색 그랜저XG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다고 증언했다. 이 차는 사건 당일 현장에서 2백m 떨어진 건물 지하주차장에서 발견됐는데, 경기도 수원에서 도난당한 차량으로 밝혀졌다.
피해자인 청원경찰 두 명은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고 경황이 없어 범인들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을 하지 못해 몽타주도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 못했다. CCTV도 설치되지 않은 상태여서 범인들의 인상착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가 없는 셈.
경찰은 탐문을 계속하던 중 사건 발생 8개월 만인 2002년 8월29일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송아무개씨(당시 21세), 김아무개씨(22), 박아무개 상병(23·당시 현역군인)을 검거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은 유흥비 마련을 목적으로 범행을 모의한 뒤 오랫동안 현금수송로를 조사한 뒤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그후 현장에서 10km 떨어진 대전 신탄진 인근 야산에서 4천여만원을 나눠 가지고 잠적했다는 게 이들의 혐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제시한 증거는 허술했다. 이들이 타고 다니던 도난차량은 ‘경기 65 러 54××’ 그랜저로 범행 당시 목격된 차량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들이 범행 흔적을 없애기 위해 차량에 불을 지를 목적으로 경유가 든 페트병 1개, 담배 3개를 이어 만든 점화장치도 범행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송씨 이외의 다른 2명이 범행을 강력히 부인하는 데다가 결정적 증거인 권총을 찾지 못해 결국 모두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송씨 또한 이후 자백을 번복해 당시 경찰의 강압수사 논란까지 일었다. 경찰이 사건 해결에 너무 욕심을 낸 나머지 무리하게 사건을 엮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반면 일각에선 이들이 유력한 용의자였는데 성급하게 일을 진행하다 결국 놓쳐버리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경찰은 은행 내부 관계자, 동일범죄 전과자, 갑자기 출처가 불분명한 거액의 돈을 가진 사람 등 기본적인 사항부터 하나하나 훑어 보았지만 아직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갑자기 거액의 돈이 생긴 사람에 대해 신고가 들어와 확인해 보았더니 로또복권 당첨자로 밝혀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건 발생 3년 1개월이 지난 지금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들은 인사이동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또다른 인원으로 채워진 사건전담반이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캐비넷에 들어 있는 수사자료만 1톤 트럭 1대분이나 되고 ‘몽타주와 비슷한 인물’에 대한 제보 만도 3백여 건, 통화내역을 조사한 것만 20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사건전담반은 이 사건 외에도 일상적인 강력사건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수사에 전념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당시 피해를 본 은행은 보험금으로 피해액을 변상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금융기관은 현금수송 안전에 신경을 더 쓴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현금을 운반하고 있다. 아직 실탄이 든 권총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기관의 현금운송차량은 어쩌면 또다른 범죄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