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관악산 입구. | ||
원래 관악산 다람쥐는 지난 96년 60여 차례에 걸쳐 관악산 일대에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금품을 털고 성폭행까지 일삼다 검거된 김아무개씨를 일컫는 ‘고유명사’였다. 김씨가 워낙 산을 잘 타고 ‘다람쥐처럼 빠르다’ 해서 경찰이 붙인 별명이었다. 그러나 김씨가 검거된 후에도 관악산 일대에는 김씨를 흉내 낸 ‘다람쥐’들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 1월31일 관악산에서 또 한 명의 ‘다람쥐’가 잡혔다. 등산객으로 가장한 여경을 상대로 금품을 뜯으려다 체포된 차아무개씨(54)가 그 장본인. 서울 남부경찰서 강력반은 근래 들어 관악산 등산로 일대에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 ‘관악산 다람쥐’형 범죄가 빈번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40여 일간 산 주변에서 잠복근무를 해왔다.
수사 결과 차씨는 2003년 6월부터 부녀자들만 상대로 30여 차례에 걸쳐 1천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차씨 본인이 경찰에 털어놓은 범죄는 1백 건이 넘는다.
사건을 맡은 서울 남부경찰서 강력반 관계자는 “차씨가 1백 건 이상 범행을 했다고 시인하고 있지만 신고된 것은 10건에 불과하다. 나머지 건은 피해 신고를 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 소소한 것들이라 일일이 밝혀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놀라운 사실은 차씨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보안장비 업체를 운영하던 사업가라는 점이다. 그는 왜 이런 범행에 나서게 된 것일까.
경찰에 따르면 차씨는 CCTV를 설치해 주는 중소기업을 운영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불황으로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사업은 개점휴업 상태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차씨 자신까지 2003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불행은 극에 달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병상에서 겨우 일어난 차씨는 요양을 겸해 집에서 가까운 관악산을 매일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이 잦아지면서 산 이곳저곳을 누비게 된 차씨. 어느 날 그는 무속인들이 바위틈이나 나무 아래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현금을 놓아둔 장면을 보게 된다. 마음 속에선 갈등이 일었지만 당장의 생계가 문제였다. 그의 다람쥐 행각은 이 돈에 손을 대는 데서 출발했다.
차씨는 고사를 지내러 오는 무속인들이 현금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불공을 드리러 오는 부녀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차츰 이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실제 그는 경찰 조사에서 “몸이 약해 남자들은 (상대가) 안 되고, 주로 혼자 오는 여자만 골라 범행했다”고 털어놨다.
차씨는 산행 때마다 목장갑과 파란색 마스크를 끼고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주로 해질녘에 혼자 다니는 부녀자나 여성 무속인이 타깃이었다. 차씨는 이들을 식칼, 톱, 망치 등으로 위협해 금품을 털었다. 한 형사는 “차씨가 몸이 불편해 피해자들과 싸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준비한 흉기로 위협만 했다”고 전했다. 다행히 실제로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었다.
차씨에게 지난해 12월30일과 31일은 대목이었다. 이 날들이 무속인들이 제사를 지내기 좋은 날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터 근처에서 무속인 손아무개씨(38)를 위협해 거금 50만원을 빼앗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차씨의 ‘벌이’는 시원치 않았던 것 같다. 한 형사는 “차씨는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오로지 돈에만 관심을 뒀다. 피해자 중에는 1천원, 4천원 등 소액을 뺏긴 사람들도 많았고, 피해자들이 지갑을 돌려달라고 하면 돈만 빼고 돌려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차씨의 다람쥐 행각은 초창기엔 일주일에 한두 차례 꼴로 이뤄졌다. 그러나 범행기간이 길어지자 그가 자주 출몰하는 등산로 일대에 ‘다람쥐 출몰’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차씨의 ‘구역’에 나타나는 등산객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돈이 급했던 차씨는 거의 매일 범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차씨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사제총을 만들어 품에 지니고 다닌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지난 1월31일 관악산 등산로 ‘삼신당 기도대’ 주변에 나타난 차씨는 여느 때처럼 만만해 보이는 범행 대상을 고르고 있었다. 오후 4시30분께 그의 눈에 한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차씨가 말을 붙이며 칼을 꺼내는 순간 뜻밖에 이 여성도 주머니에서 가스총을 꺼내 들었다.
예의 여성은 바로 등산객으로 가장해 잠복근무중이던 강력반 이희정 순경(25). 이 순경 또한 피해자들이 알려준 인상착의에 따라 목장갑과 파란색 마스크, 녹색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차씨를 보고 ‘관악산 다람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순경의 다급한 고함소리와 함께 주위에 포진해 있던 형사들이 달려왔다. ‘다람쥐’가 덫에 걸려드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