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으로 내달린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
한때 수십억원을 손에 쥔, 잘나가는 창업 전문가였던 김아무개씨(51)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사기 혐의로 구속되면서 자신이 쓴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는 지난 2000년 주식회사 미래이넷을 설립한 뒤 고수익을 보장하겠다며 일반 투자자들을 모집, 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 6일 김씨를 구속 기소했다. 김씨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낸 35명의 피해자들은 “원금을 반환할 능력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을 모집한 것은 처음부터 사기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며 “김씨가 창업 관련 책을 여러 권 썼으며 방송에도 출연한 ‘유명인’이라는 배경을 이용해 허위 광고까지 냈다”고 고소 이유를 밝혔다.
8년 동안 18개 점포를 운영하며 10억여원을 벌어 ‘프로 장사꾼’, ‘우리나라 최고의 창업전문가’란 수식어로 매스컴을 통해서도 소개됐던 김씨가 나이 쉰을 넘어 구치소 신세를 지게 된 원인은 바로 욕심 때문이었다.
김씨가 매스컴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지난 1996년 외환위기로 우리나라 기업에 거센 명예퇴직 바람이 불면서부터. 방송사에서는 앞 다투어 창업과 부업에 관한 프로그램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자신의 창업 경험을 토대로 ‘미래유통정보연구소’란 컨설팅 업체를 차린 김씨는 자신의 장사 성공담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해 12월 발간된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라는 저서는 15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갈 정도였다.
단돈 3백만원으로 장사를 시작해 8년 동안 10억을 번 김씨의 성공스토리는 그를 TV 토크쇼의 주인공으로, 재연 프로그램의 실제 인물로 끌어올렸다.
가난한 소작농 아들의 꿈
가난한 소작 농가의 막내로 태어나 끼니를 때우는 것조차 힘들었던 김씨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어려서부터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팬티’라는 것을 입어 보았는데, 학교에서 신체검사를 한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가 배급 물자로 나온 미국 밀가루 포대로 부랴부랴 만들어 준 것이었다는 일화는 토크쇼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집안은 어려웠지만 ‘돈도 학교를 다녀야 더 잘 벌 수 있다’는 말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진학한 김씨는 학비를 벌기 위해 제약회사 영업직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상이 큰 중대형 약국을 공략, 바쁠 때 찾아가 열심히 도왔던 덕에 아르바이트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판매왕’이 되었고, 영업소장직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원을 마치자마자 과감히 사표를 냈다. 당시 회사에서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계속 남기를 원했지만 김씨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의 꿈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재래시장과 슈퍼마켓, 백화점과 같은 유통업이 아니면 이력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김씨는 상품 배달을 잘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슈퍼마켓 배달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물건 잘 파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시장에서도 일하는 등 1년여 동안 열여섯 차례나 직장을 옮겨 다녔다. 이후 3년 반 동안은 유통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며 백화점 관련 컨설팅 업무를 담당했다. 백화점의 위치와 규모, 또 그 건물 어디에 어떤 매장을 위치 시켜야 수익을 낼 수 있는지 등을 연구하며 ‘장사꾼’으로 거듭날 차비를 했던 것이다.
창업 후 '승승장구'
단돈 3백만원으로 5평짜리 만두 가게를 차린 이후 10년 동안 18개 점포를 운영, 10억원을 벌었다는 김씨의 성공담은 기업체에서 김씨를 초빙, 조기 ‘명예퇴직’ 권고를 위한 목적으로 이용했을 정도였다.
김씨 역시 “대학원까지 보내 놨더니 만두 장사나 한다”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냈고, 창업에 뛰어들었기 때문.
1985년 처음 시작한 만두 가게가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잘되자 새 점포를 열었고, 이후 레코드점, 수입상품점, 양말대리점, 액세서리전문점, 독서실 등을 운영해 10억원을 벌었다. 남들이 어느 세월에 버느냐고 비웃었던 10억원, 점포가 늘어나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자만하지 않고 근검 절약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막상 10억원을 벌고 나니 김씨도 욕심이 생겼다. 처음 만두 가게를 시작할 때 “10억만 벌고 나면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겠다”던 김씨의 마음 속에 “나라고 대기업 사장이 되지 말란 법 있느냐”는 욕망이 고개를 들었던 것.
10년 사이 배짱도 커졌다. 결국 그동안 쌓아 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창업 컨설팅 업체를 차린 것이 1996년. 이후 책 발간과 더불어 방송에도 출연하게 되고 명예까지 얻게 되자 김씨의 ‘가치’는 더욱 치솟았다.
후에 김씨는 이 시기의 자신을 회고하며 “강연을 더 잘하기 위해 연기학원을 다녔을 정도로 명예욕에 사로 잡혀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사업 키우다 건강까지 잃어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했던 김씨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아니었다는 것이 2000년도에 들어와서야 검증이 됐다. 국내 최대 건설사였던 H건설이 30층짜리 빌딩 8개를 신축중인데 분양을 맡아 달라고 제의했던 것. 고민 끝에 2천9백억원 상당의 주상복합상가 분양 업무를 맡게 된 김씨는 한 달에 5천만원씩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3백평 규모의 창업투자몰을 개관했다. 여기에 건물 관리까지 맡게 되면서 처음 설립했던 미래유통정보연구소를 분리해 부동산 관련 법인까지 만들었다.
계획대로라면 2백억 정도를 벌 수 있었던 그 거대한 프로젝트는 그러나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대적인 창업 박람회를 열었지만 부동산 열기가 식으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해 연말에는 건설사에 유동성 위기가 닥쳐오면서 계약했던 물건마저 환불을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 결국 회사 측의 일괄 매각 방침에 따라 김씨 또한 많은 돈을 잃었다.
이 시기에 김씨는 (주)미래이넷 대표로 벤처 사업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H건설 분양 사업을 맡으면서 설립했던 부동산 법인에 이어 또 다른 사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 고장난 컴퓨터를 온라인으로 원격 치료하는 솔루션 개발 업체였다. 여기에 일단 자본금 5억원을 투자하고 나니 기술 개발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김씨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주식을 공모, 10억원을 유치할 수 있었다. 일본, 중국 바이어들과 수출 계약까지 체결됐다.
그러나 이듬해 벤처 붐은 ‘불황’으로 반전됐고 김씨의 사업체도 큰 어려움에 처했다. 이때 생각해 낸 것이 외식 사업. 김씨가 처음 시작한 것이 먹는 장사였고 이를 발판으로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김씨의 손은 10여 년 전과는 달리 수십억원을 쥐었다 놓았다하는 손이 돼 있었다. 광고비만 1억5천만원, 장소 대여비 등을 포함해 2억원이 든 대규모 설명회를 개최하는 통큰 모습을 보이며 10억원을 투자, 외식 사업을 시작했다.
“불황기에 대리점을 모집할 수 있겠냐”는 주위의 우려를 깨고 하루 만에 86장의 대리점 계약서가 들어오면서 2001년 11월, 김씨는 4개 법인에 종업원 1백명이 넘는 거대 사업체를 운영하게 됐다. 김씨의 표현대로 벤처기업의 주식 가치까지 따져 “1백억원대 사업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너무 큰 욕심이 화가 된 것일까. 김씨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건강을 잃어가고 있었다. 98년 심장 발작을 일으켜 수술을 받았으나 건강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2001년 말 4개의 사업체를 이끌면서부터는 한 달에 두세 번씩 병원으로 실려 가야 했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가 겹치며 2002년 여름, 사업체가 잇달아 부도를 내면서, ‘창업 신화’를 이룩하려 했던 김씨의 욕망은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이제 돈은 중요치 않다
돈과 명예, 여기에 가장 중요한 건강까지 잃고 나니 김씨의 가치관도 변했다.
최고의 위치에서 집필한 여러 권의 책에서 “인생에서 돈은 중요하다”고 말했던 김씨.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면서 쓴 최근 저서에서는 “큰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면 훨씬 더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그것을 채우고 나면 그때는 이미 자기가 바라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고 밝히고 있어 무척 대조적이다.
지난 7일 김씨를 면회하고 왔다는 한 측근은 “김씨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며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부도가 났을 당시 법인 대표로서 재산을 다 처분하고 소임을 다했기에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할 것”이라는 김씨의 입장을 전했다.
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