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패륜 뒤에 말 못할 ‘사연’ 있나
무엇보다 이번 사건의 의문점은 자백과 주변 사람들의 진술 말고는 아무런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범행 동기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지만 과연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도 몇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다. 사건을 추적해 본다.
충북 제천경찰서는 지난해 12월 25일 소주에 제초제를 섞어 아버지를 독살한 혐의로 아들 전아무개씨(22)를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군 입대를 면제 받기 위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전씨가 진술했다고 덧붙였다. 경찰이 발표한 범행 전모는 이렇다.
전씨가 범행을 계획한 것은 두 달 전인 지난 10월경. 고등학교 졸업 후 이렇다 할 직업도 구하지 못한 채 전국 각지를 떠돌던 전씨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제천으로 돌아온 전씨는 군 입대를 연기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때부터 아버지 살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에 아버지가 죽으면 가족을 부양할 사람이 없어 군대를 안 가게 되는 줄 알았다”고 전씨는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그러나 병무청 관계자는 “본인이 아니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양 가족 수, 월수입액 등을 따져 병역감면처분이 내려지는 것이지 아버지가 없는 독자라고 해서 무조건 면제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전씨가 소주에 제초제를 탄 것은 입영 전날인 지난 12일 오전. 경찰 발표에 따르면 평소 아버지가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전씨는 냉장고 문을 열다 소주 반병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씨는 집에서 쓰고 남은 제초제를 섞어 아버지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다.
소주에 제초제를 섞으면 빛깔이 변하지만 전씨는 아버지가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씨는 술집에서 웨이터로 일할 때, 아버지가 양주를 갖다 달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고 제초제를 섞은 소주를 양주로 착각해 마실 것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결국 전씨의 아버지는 제초제가 든 소주를 먹고 쓰러졌고 이날 오후 5시경 중학생인 여동생에 의해 발견됐다. 병원으로 실려 간 전씨의 아버지는 위세척을 했지만 장기가 이미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병원측은 “더 이상 가망이 없으니 집에서 임종을 지키라”는 진단을 내렸고 그날 저녁 전씨의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옮겨졌다.
아버지에게 범인이 아들 전씨라는 것을 처음 들은 사람은 전씨의 여동생. 하지만 전씨는 범행을 부인했고 가족들은 자살을 시도했던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워 오자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전씨의 어머니는 경찰조사에서 “반신반의하면서도 설마 아들이 아버지한테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씨를 용의자로 다시 지목한 것은 고모들이었다. 전씨의 아버지가 걱정돼 찾아온 친척들이 전씨의 아버지에게 “그렇게 죽고 싶었냐? 자살은 왜 하냐?”며 다그쳤고 이때 전씨의 아버지가 다시 “아들놈이 소주에 농약을 탔다”고 말한 것.
경찰에 따르면 이 얘기를 들은 전씨 아버지의 형제들 역시 처음에는 제 정신에서 나온 말인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식은 분명했던 전씨의 말이라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고 화가 난 전씨의 고모들과 반신반의했던 어머니는 며칠 동안 이 문제를 놓고 의견 마찰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전씨는 이보다 앞서 13일 입영 길에 올랐으나 3일 후 “간과 폐가 좋지 않아 귀가 조치가 내려져 곧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집으로 전화를 했다. 가족들은 전씨에게 당시 상황을 전하며 빨리 돌아오라고 전했지만 이 얘기를 들은 전씨는 “알았다”며 전화를 끊은 뒤 소식이 끊겼다. 전씨가 행방을 감추자 전씨의 어머니는 아들을 범인이라고 보고 다음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강원도 동해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PC방에 있던 전씨를 검거했다. 전씨가 경찰 조사에서 범행 일체를 자백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다.
경찰 발표를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한편에서는 “단순히 군대에 가기 싫어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도 나왔다.
주변에선 전씨의 어려운 가정환경과 무능력한 아버지와의 불화가 살인의 원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전씨의 아버지는 10년 전 농사를 짓다 쓰러져 뇌진탕 증세를 보였고 그 후유증으로 일도 못한 채 술로 세월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회관에서 만난 주민들은 전씨의 아버지에 대해 “하루라도 술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었다”며 “동네 사람들에게 1천~2천원씩 소주 값을 구걸하고 다녔다”고 전했다. 아버지 대신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던 전씨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힘겹게 일을 했지만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해 마을 교회에서도 성금을 전달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제천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이 같은 불화설에 대해서 “성인이 된 후에는 다른 지역에서 생활해 집에서 지낸 적이 거의 없다”며 “정이 깊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있겠지만 불화를 범행 동기로 볼 만한 근거는 없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병역을 면제 받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전씨는 왜 입영 하루 전에야 아버지를 독살하려한 것일까. 면제를 받기 위해서라면 면제 신청을 할 수 있는 기간에 미리 범행을 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군대에 안 가기 위해 아버지까지 독살하려던 사람치고는 너무 순순히 입영 길에 오른 것도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한 경찰 발표대로라면 아버지는 아들 전씨가 외출한 후 제초제가 든 소주를 마시고 쓰러졌다. 그렇다면 전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범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 사건은 전씨의 자백 이외에 물증은 일체 없는 상황. 제초제나 소주병에서 지문조차 채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전씨의 자백과 주변 가족들의 “범인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진술을 빼면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현재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로 아들이 구속되긴 했지만 사건 전반에 걸친 의혹들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충북 제천=양하나 프리랜서 hana01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