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금 2천만원 임자 못 찾고 쿨쿨
납치범들의 치밀한 범행 계획도 그렇고 납치범들과 경찰의 차량 추격전도 영화를 방불케 했다. 더구나 경찰은 1년이 가깝도록 범인들에 대한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상태다. 자칫 잘못하면 영구 미제 사건으로 처리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범인들을 눈앞에서 놓친 경찰의 위신은 말이 아니다.
지난해 5월 22일 새벽 5시 대전 중구 용두동의 한 찜질방에서 나오던 김 아무개 씨(여·당시 59세)가 두 명의 범인들에 의해 납치됐다. 당시 이 사건은 납치된 김 씨가 대전 모 건설업체 사장의 부인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장부인 납치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경찰은 납치범들을 검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다. 이들에게 돈이 건네지는 순간을 포착, 범인들을 추적하기도 했지만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결국 납치범들은 강탈한 돈 1억 9000만여 원을 빼앗아 사라진 이후 종적을 감춰 버렸고, 이 사건은 1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계속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납치범들은 김 씨가 건설업체 사장의 부인인 데다 부동산 임대업을 하고 있는 100억 원대 재력가라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하는 등 치밀한 범행 계획을 세웠다. 경찰은 이들의 신출귀몰하고 대담한 수법으로 미뤄볼 때 추가 범죄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일요신문>은 납치범이 남긴 협박전화 육성 녹음테이프를 입수했다. 이를 통해 이들의 범행이 어떻게 진행됐고 경찰 수사가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지 집중 추적했다.
당시 사건 경위는 이렇다. 사건 발생 전날 김 씨가 혼자 고급 벤츠 스포츠카를 몰고 외출했다. 김 씨가 새벽 5시 찜질방에서 나와 자신의 차에 오른 순간 미리 잠복하고 있던 두 명의 30대 괴한이 차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소스라치게 놀란 김 씨는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납치돼 어디론가 끌려갔다.
경찰에 따르면 납치범들은 김 씨를 납치한 직후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납치 사실을 알리며 몸값으로 4억 원을 요구했다. <일요신문>은 그 통화 내역을 입수했다.
납치범들은 피해자 가족과의 통화에서 “6개월 동안 조사해서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재산이 100억 원인데 몸값 4억 원 정도 마련 못할 리는 없지 않나”라며 “원래는 너희(전화 받은 피해자의 아들) 형제를 납치하려 했는데 상황이 안 돼서 못했고 너희 아버지는 외국 출장 가는 바람에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희 엄마를 납치한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고 말했다.
또 이들은 김 씨의 아들이 “어머니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게 해 달라”고 하자 “너희 가족들만 아는 특정 단어를 이야기 하면 답을 네 어머니로부터 물어서 그 목소리를 녹음해 들려주겠다”며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약속만 지키면 살려서 보내 준다. 걱정마라. 신고는 우리한테 돈을 주고 어머니를 구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 우리 말 듣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지능적으로 협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전화 내용에 따르면 이들이 사전에 철저한 조사를 통해 범행대상을 물색했으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범행을 모의했음을 알 수 있다.
납치범들은 돈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신권 지폐 말고 반드시 구권 현찰로 가져와야 된다”고 말하는 등 대단히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대전 중부서의 한 관계자는 “신권을 대량으로 사용하거나 달러 등으로 환전할 경우 범인들의 이동경로 추적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며 “범인들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구권을 요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납치범들은 어떻게 경찰의 그물망을 빠져 나갈 수 있었을까. 이들은 김 씨의 아들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장소를 여러 번 바꿀 것이니까 그렇게 알고 돈을 가방 두 개에 나눠 담으라”고 지시한 뒤 “일단 어머니를 살리는 게 중요하지 않나. 경찰에 연락은 나중에 해도 되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해라”고 했다.
아들은 이를 경찰에 신고했고 납치범이 시킨 대로 당장 마련된 현찰 2억여 원을 두 개의 가방에 나눠 담은 뒤 자신의 차에 실었다. 경찰은 아들의 돈 가방과 자동차에 위치추적 장치를 설치한 후 납치범들과 접촉토록 했다.
▲ 경찰이 수배한 납치범 몽타주. | ||
하지만 경찰은 8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납치범들을 에워쌌지만 돌발적인 도주행각에 당황한 나머지 그만 놓치고 말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 위치 추적기를 달아 놓았지만 범인들이 야산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전파 방해로 위치 추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김 씨는 이날 대전 유성구 노은동 월드컵경기장 주변에서 무사히 풀려났다. 범인들은 현금이 든 가방을 부랴부랴 챙겨 야산을 타고 달아났는데 이 과정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납치범들이 챙긴 돈은 1억 9600만 원.
이들이 남긴 것은 도피과정에서 떨어뜨린 돈다발 몇 개와 모자, 머리카락, 혈흔 등이 있지만 이것들을 통해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경찰은 돈다발에서 지문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경찰관계자는 “당시 범인들이 탈취했던 아들의 차량을 샅샅이 뒤졌지만 지문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애초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꼈던 것 같다. 정말 대단히 치밀한 놈들”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대전 지역에서 최근 납치범들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국산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는 제보도 있었지만 정확한 차량 파악에는 실패했다. 경찰은 녹음된 납치범의 목소리를 통해 억양을 분석한 결과 충북이 아닌 충남지방 사투리가 짙게 섞여 있다는 점을 발견했지만 이것이 특별한 단서는 되지 못하고 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얼마 전 대전 납치사건의 용의자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안다는 신고가 들어 와서 부리나케 달려가 확인했는데 아니더라”며 “현재 그 납치범을 둘러싸고 별별 소문이 다 있지만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아쉬워했다.
이 사건의 납치범에 대해서는 공범의 수, 나이, 생김새, 행방, 신원 등 아무것도 드러난 게 없다. 이들의 몽타주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납치범을 목격한 김 씨와 그 아들이 정확한 인상착의를 기억하지 못해 정확성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신출귀몰한 납치범들은 지금 어디선가 경찰을 비웃으며 유유히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또한 경찰에 신고했던 김 씨 가족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완전범죄의 자신감으로 추가 범행을 계획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의 불안은 가중되고 있다.
경찰은 2000만 원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이들의 행방을 좇고 있다. 현상금 가운데 1000만 원은 피해자 가족 측이 내걸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아직까지 납치범 검거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윤지환 프리랜서 tan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