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배신당한 경험이 ‘기폭제’
▲ 왼쪽부터 99~2000년에 9명을 살해한 정두영 현장검증, 2000년 검거된 고창연쇄살인 주범 김해선, 2004년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유영철 현장검증. | ||
75년 김대두에서부터 2004년 유영철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역대 연쇄살인범들은 뚜렷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력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부터 폭력이나 충격적 경험을 당하기도 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거나 동거녀 및 여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대개 단순 절도 강간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린 이후 사회적 냉대를 견디다 못해 본격적인 연쇄살인 행각에 바로 뛰어든 경우도 허다했다. 정 씨 역시 이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제 ‘한국형 연쇄살인범’의 유형과 특성을 철저히 분석하는 프로파일링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의 몇 안 되는 프로파일러 전문가 중 한 명인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최근 자신이 펴낸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약 20건에 이르는 국내의 대표적인 연쇄살인 사건 및 연쇄살인으로 추정되는 사건과 유사 사건들을 소개했다. 여기서 그는 연쇄살인범의 특징으로 “2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의 남성으로 일정한 직업 없이 미혼이거나 혹은 결혼에 실패한 독신. 어린 시절 학대 등 충격적 경험을 당한 불우한 가정환경. 내성적 성격으로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잘 보여주려 하지 않는 외톨이 성향. 이성에 지나치게 집착. 순간적인 폭력성이 드러나거나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성격”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유영철이 나타날 때까지 국내 ‘연쇄살인’의 상징적 인물은 75년 ‘경기도 내 외딴집 일가족 연쇄살인 사건’의 주인공 김대두(당시 26세)였다. 그는 두 달 동안 주로 경기도의 외딴집만 골라 일가족 등 무려 17명을 살해하는 ‘이유없는’ 살인 행각을 이어 나갔다.
김 씨는 15세에 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했고 학습능력도 떨어졌다. 중학 진학에 실패했고, 허약 체질로 인해 군 입대마저 좌절되면서 그의 열등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부모와의 불화로 가출, 광주와 서울의 공장 등을 전전했으나 역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사회에 대한 불만은 그의 폭력성을 키웠고 사소한 시비로 폭력 전과 2범이 되었다. 가뜩이나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출소한 이후 자신에 대한 주변의 냉대가 더 심해지자 “어떻게 하든 돈을 많이 벌어 나를 멸시하는 놈들에게 복수하겠다”며 연쇄살인 행각에 뛰어들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15년 후에 반복됐다. 지춘길(당시 47세)은 90년 경북 안동 일대의 시골 외딴집을 무차별적으로 급습해 약한 노인들을 상대로 연쇄 방화 살인을 저질렀다. 고아로 자란 지 씨는 어린 시절부터 생존을 위해 절도를 배웠고 자연스럽게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특히 청송감호소에서 10년이 넘게 수감되면서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
40대 후반의 나이로 출소한 그가 갈 곳과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이 땅의 권력자들을 상대로 복수하겠노라는 결심을 했지만 실제 그의 잔인한 범행 대상이 된 것은 시골의 힘없고 가난한 노인들뿐이었다.
▲ 유영철이 범행에 사용한 망치. | ||
98년 여성들을 상대로 한 연쇄살인사건으로 검거된 황영동(당시 49세)도 흡사했다. 그 또한 가족도 없고 배운 것도 전혀 없었다. 20년 가까이 교도소에서 보낸 전과 14범인 그가 사회에 나와도 역시 할 일은 없었다. 추가 범행에 나섰던 것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여성에 대한 집착이 많았다. 대개의 연쇄살인범의 경우 동거녀 및 애인 혹은 부인에게 버림받은 복수심을 일반 여성들에게 표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내 나이만큼 여성을 살해할 계획이었다”는 끔찍한 말을 토해냈던 94년 택시기사 연쇄살인범 온보현(당시 37세)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음주벽과 외도가 심한 아버지 밑에서 불우하게 자라났다. 결국 어머니는 그가 24세 때 자살했다. 온 씨는 이 모든 것이 아버지 탓이라고 여기고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른 뒤 가출, 이후 가족들과 완전히 연락을 끊고 혼자 지냈다.
이후 그는 조금만 화가 나도 참지 못하는 폭력적 성격으로 변해갔고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던 여자친구마저 자신을 떠나자 여성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 그는 ‘범행일지’까지 직접 작성해가며 여성 납치 행각을 거듭하다가 결국 자수했다.
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울산 경남 지역에서 연쇄 강도 행각을 벌여 9명을 살해한 정두영(당시 32세)은 끔찍하게 사랑했던 동거녀에 대한 집착이 연쇄살인을 불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유복자였다. 어머니는 그를 삼촌 집에 맡기고 재혼했다. 결국 그는 5세 때 고아원에 맡겨졌다. 다행히 7세 때 어머니가 다시 그를 찾았으나 새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잦은 불화, 경제적 궁핍 등으로 다시 한 번 고아원에 맡겨져야 했다. 어머니에게 두 번씩이나 버림받았다는 충격이 컸다. 이런 그의 의식은 실제 강도 행각에서 한 30대 여성이 “아기가 있다. 제발 살려달라”고 빌자, 폭행을 멈추고는 “아기 잘 키워라”며 그냥 나간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역시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혼자 내버려진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절도와 폭력을 배웠으며 결국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동거녀의 존재는 그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가족의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것이 강박관념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동거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에 크게 한탕을 노린 것이 결국 연쇄강도 행각으로 나타났다.
2000년 12월 ‘고창연쇄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검거된 김해선(당시 32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가출했다. 그는 외항선을 탔고 돈도 좀 벌어 여자를 사귀어 동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믿었던 동거녀에게 강간죄로 고소당해 처벌받는 배신을 당했다. 이후 사귀던 다방 아가씨가 다시 다른 남자를 만나는 데 격분, 둘을 살해하려다 포기하고 그냥 고향인 고창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 인근 야산에서 초등학교 5년 여자 어린이와 여고 1년생을 잇따라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지난 2004년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유영철(당시 34세) 또한 어린 시절 부친의 가정 폭력과 부모의 이혼, 계모 학대 등의 충격적 경험을 당했다. 중학교 시절 그는 예술적 자질이 뛰어났으나 가정형편으로 제대로 된 예술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정규 고등학교도 진학할 수 없었다. 그의 직접적인 범행 동기는 교도소 수감 시절 아내의 일방적인 이혼 통고 때문이었다.
이번에 검거된 정 씨 역시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등 심한 대인기피 증세를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