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켈리백’은 임신 감추기용 ‘소품’
고전 할리우드 배우이자 모나코의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에르메스 제품을 즐겨 착용했다.
1954년에 <나는 결백하다>를 촬영하던 중 히치콕 감독은 의상감독인 에디스 헤드에게 에르메스 제품들을 영화에 쓰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영화의 전반적인 톤과 에르메스의 비주얼이 잘 맞는다는 판단이었고, 에디스 헤드는 그레이스 켈리에게 어울리는 에르메스 제품들을 영화에 등장시켰다. 이때부터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에르메스의 지갑과 가방에 빠져들었고, 실생활에서도 에르메스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1956년에 모나코의 왕자 레니에 3세와 결혼한 그레이스 켈리는 곧 첫 딸 캐롤라인을 임신했는데, 외출할 때 파파라치의 플래시 세례에 배를 감추기 위해 악어 가죽으로 만든 넉넉한 사이즈의 빨간색 에르메스 백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사진이 <라이프> 잡지에 실리면서, 수많은 여성들이 켈리의 가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판매가 급증했다. 공식적으로 ‘켈리백’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모나코 왕실의 허락을 얻은 1977년. 1982년에 켈리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켈리백’은 지금도 불멸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배우이자 가수였던 제인 버킨과 에르메스가 만나, 실용적인 ‘버킨백’이 탄생했다.
작업실로 돌아간 에르메스는 곧 디자인에 들어갔고, 1984년에 다용도의 넓고 유연한 검정 가죽 가방인 이른바 ‘버킨백’을 만들어 제인 버킨에게 보냈다. 그 선물엔 “가방에 세상과 꿈을 담고 다니는 그대를 위하여”라는 메모가 있었다. 여행과 외출이 잦은 사람들을 위한, 단단하고 편리하면서 커다란 가방 ‘버킨 백’은 그런 실용적 이유로 탄생했고, 만약 그날 에르메스 옆에 버킨이 앉지 않았다면 이 아이템은 어쩌면 아직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켈리백이든 버킨백이든 그 시작은 실용성이었지만, 가격만큼은 엄청난 수준이며 예약을 하고도 몇 개월 후에야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장인이 이 가방 하나를 만드는 데 18시간에서 길면 25시간까지 걸린다고 한다.
비틀스 멤버들이 직접 주문해서 제작된 비틀부츠.
이후 비틀부츠는 196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동료 뮤지션들은, 마치 그 신발을 통해 록의 연대감이라도 가지려는 듯 굽 높고 뾰족하며 타이트한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그룹은 롤링스톤스였다. 밥 딜런도 비틀부츠를 자신의 고정 패션 아이템으로 정착시켰다. 킨크스, 야드버즈, 버즈, 비치보이스, 도어즈 등 다양한 성격의 그룹들이 비틀부츠를 신었고, 로이 오비슨 같은 가수도 마찬가지였다.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도 비틀부츠의 애용자 중 하나였다. 세월이 지나도 추종자는 여전히 등장했다. 이기 팝도 비틀부츠를 신었고, 펫숍보이즈의 닐 테넌트나 악틱몽키즈의 알렉스 너터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오스틴 파워>(1999) 같은 영화에선 과거 영국으로 돌아간 마이크 마이어스가 비틀부츠를 신고 등장하기도 했다. 러셀 브랜드 같은 코미디언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1960년대 붐을 일으켰지만 1970년대에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하지만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펑크 붐이 일어나면서 부활했다가, 1990년대에 다시 사라졌던 비틀부츠. 하지만 2000년대 말부터 서서히 유행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비틀스가 해체한 지 45년이 되어가지만 꾸준히 부활하고 있는 스타의 패션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