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발한 실종자 ‘제 3의 눈’으로 추적
▲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실종된 여성 들을 찾기 위해 비봉면 일대를 수색하고 있는 경찰들. 실종자들은 당시 이 일대에서 휴대폰 전원이 끊긴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 ||
실종자들이 범죄에 희생됐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최근 일각에서는 최면수사와 초과학적 기법을 접목시켜 이번 사건의 단서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실종자 가운데 도우미 A 씨에 대해서는 한번쯤 되짚어볼 만한 정황이 제시돼 경찰도 참고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과연 ‘초과학’으로 연쇄실종사건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한 가닥이라도 풀어낼 수 있을까.
지난 2003년 3월 23일 새벽 4시 20분경 인천 중구 항동에 위치한 ○○무역회사 사무실에서 여사장 A 씨(당시 46세)가 흉기에 무려 17군데를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됐다. 당시 사건 현장에는 참혹한 사체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경찰은 현장 주위와 피해자 주변인물, 사무실 출입자들에 대한 탐문수사를 벌이는 한편 이들의 통화내역까지 조사했지만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수사는 오직 목격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유일한 목격자는 당시 옆 건물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당직근무 중이던 B 씨(당시 22세). 하지만 B 씨는 그날 밤 상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B 씨는 “밤 11시 30분경 여자친구가 사무실로 놀러왔고 10분 정도 지나 승용차 1대가 라이트를 끄고 ○○무역 창고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새벽 1시 30분경 차량 시동을 켜는 소리를 듣고 차가 정문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했으나 범인이 타고 온 차량은 라이트와 미등을 모두 끄고 다녀 차종이나 색상, 차량번호 등을 전혀 식별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5일 후 두 시간에 걸쳐 B 씨를 대상으로 최면을 실시해 “차량은 트렁크가 없는 차량이며 빨간색의 마티즈와 같은 경차”라는 구체적인 진술을 얻어냈다. 그리고 이에 근거, 용의차량을 좁혀나간 끝에 결국 범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에서 보듯 ‘최면 수사’는 최면 상태에서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남겨진 기억의 조각들을 끄집어내 수사에 활용하는 기법이다. 최면 수사의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자칫 미궁에 빠질 뻔한 사건들이 이 같은 보완 수사기법의 도움으로 해결된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류한평 박사가 목격자에게 용의차량 번호를 최면으로 떠올리게 함으로써 미궁에 빠졌던 유괴납치사건 범인을 검거하게 된 것이 최면수사의 첫 성공사례로 꼽힌다. 특히 최면수사는 범죄 현장에 지문이나 혈흔 등의 물적 단서가 남아 있지 않거나 결정적인 목격자나 피해자의 기억이 없을 때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경찰의 의견이다. 현직 형사로서는 드물게 최면기법을 사용해 여러 가지 미제 사건들을 해결한 바 있는 전남지방경찰청 김건태 형사는 “최면기법을 잘 활용하면 미궁에 빠진 수사의 실마리를 푸는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단서나 증거도 없고 목격자나 피해자도 없는, 최근의 화성 연쇄실종사건 같은 경우에는 어떨까. 흔하지는 않지만 외국에서는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를 활용해 사건의 실마리를 푼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외국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성 10명 중 1명, 여성 4명 중 1명꼴로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현실에서 이 능력을 개발하거나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최근 한 민간 최면전문가는 화성 연쇄실종사건과 관련, 최면기법을 통해 사이코메트리 같은 인간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려 수사의 단초를 찾으려는 작업을 일부 형사와 ‘공조’해 진행하고 있다. 경영학 박사 출신으로 대학출강을 하다가 수도권에서 최면학습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변중완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사건의 목격자가 있다면 목격자를 상대로 최면을 걸어 사건 관련 기억을 유도해낼 수도 있지만 이번 사건은 목격자도 없는 사건. 그래서 변 원장이 활용한 최면기법은 실종자의 사진을 제3자인 최면대상자들에게 보여주고 사건 당시 실종자가 처한 정황을 떠올리도록 하는 방법이다. 즉 최면상태에서 인간의 잠재능력을 끌어올려 마치 사이코메트릭을 하듯 연상되는 기억을 유도하는 작업이다. 변 원장은 “최면의 기법을 심도 있게 다루다 보면 피해자의 소지품이나 사진만으로도 과거 행적 및 어떤 사건 당시의 상황을 추적해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변 원장은 5명의 최면 대상자에게 화성 연쇄실종 사건 실종자들의 사진을 보여준 뒤 서로를 고립시킨 상태에서 최면기법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종자 가운데 한 명인 노래방 도우미 A 씨의 경우 거의 똑같은 결과가 도출됐다는 것. 실종자와 범인만이 알고 있을 당시 상황에 대해 서로 모르는 제3자들이 거의 똑같은 진술을 한 셈이다. 이들 최면 대상자는 국문학, 유전공학, 전자공학 등을 전공한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변 원장은 이들 최면 대상자들이 최면상태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한 내용을 종합하면 △A 씨가 사건 당일 노래방에서 일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나가 도로변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으며 △당시 A 씨는 스타렉스나 카니발 같은 차량에 탑승했고 차량운전자와 A 씨는 과거에 알던 사이였으나 현재는 서먹해진 사이처럼 보였고 △이 차량은 수원역 지하도로를 통해 제부도 쪽으로 향하다가 도로변에 멈춰섰고 이곳에서 두 사람이 심한 언쟁을 벌였으며 △문제의 운전자는 베이지색 계통의 점퍼 모양의 윗옷과 폴라티를 입고 있었고 체형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최면 대상자들이 더 거론한 부분들도 많으나 실종자의 생사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점, 경찰 수사에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점 등을 고려해 구체적인 인 내용은 더 이상 밝히기 어렵다는 게 변 원장의 얘기.
변 원장은 최면기법으로 얻어낸 이 같은 결과를 경찰 측에 통보, 현재 몇몇 형사들과 함께 사건 당일 실종자들의 행적 등을 역추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경찰도 사건이 계속 답보상태에 머물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변 원장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한 형사는 변 원장의 조언을 계기로 그간 수사에서 혹시 놓친 부분은 없는지 당시 사건 정황을 하나씩 되짚어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변 원장이 시도한 이 최면기법은 기존 최면 수사와는 달리 사건과 관련이 없는 제3자에 대한 최면이라는 한계를 분명 갖고 있다. 또한 그 효과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상태다. 하지만 최면기법에 응한 이들이 동일하게 당시 상황을 그려내고 있는 데다가 현장 인근과 실종자 주변인물에 대한 얘기 역시 실제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일부 형사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최면기법과 초과학적 방법으로 화성 연쇄실종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을까. 향후 수사 결과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