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악몽 ‘놈은 짐승이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만 쏟아내던 A 씨는 한참 후에야 마음을 추스르고 그간의 일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무려 34년 동안 이어진 한 남자와의 지독한 악연에 대한 것이었다. A 씨의 충격적인 진술에 형사들은 한동안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34년 전인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4세였던 A 씨는 철없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집을 뛰쳐나왔다. ‘가출소녀’인 A 씨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숙식 해결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회경험도 전무한 데다 미성년자였던 A 씨가 일할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간신히 무허가 직업소개소를 통해 소개받은 곳은 한 호프집이었다. 비록 서빙이라 해도 어린 나이에 술집에서 일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A 씨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때만 해도 A 씨는 바로 이날의 선택이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눈 질끈 감고 몇 달만 일해보자’라는 생각에 첫 출근을 한 A 씨. 하지만 악몽 같은 사건은 출근 첫날에 일어났다. 영업이 끝난 그날 새벽, 잠들어 있던 A 씨의 방으로 낯선 남자가 불쑥 찾아왔다. 때마침 이곳에 머물고 있던 호프집 사장의 동생 B 씨(51·당시 17세)였다. 연약한 소녀의 몸과 마음은 속수무책으로 B 씨에게 유린당하고 말았다. A 씨는 죽을 힘을 다해 호프집에서 도망나왔지만 B 씨와의 악연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그날 이후 B 씨는 A 씨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아무리 피해도 소용없었다. B 씨는 A 씨를 귀신같이 찾아내 괴롭혔다. 어린 마음에 성폭행당한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웠던 A 씨는 누구에게도 쉽사리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B 씨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당하던 A 씨의 심신은 하루가 다르게 만신창이로 변해갔다. 그런 지옥 같은 날들이 무려 수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A 씨는 간신히 B 씨의 마수를 피해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혹시라도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숨어지내길 몇 년. 마침내 A 씨는 지난 83년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결혼생활은 더없이 행복했다. 남모를 상처를 안고 어렵게 꾸린 가정은 A 씨에게 더없는 평안함을 안겨주었다. A 씨는 성폭행의 악몽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도 행복한 결혼생활로 인해 차츰 잊혀졌고 B 씨에게 받았던 지독한 상처도 아물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A 씨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정을 이뤄 오순도순 살고 있던 A 씨 앞에 갑자기 B 씨가 나타난 것이다.
20여 년 전 꽃잎처럼 연약하던 소녀를 짓밟았던 B 씨는 여전히 A 씨를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역시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두고 있는 어엿한 가장이었지만 A 씨에 대한 삐뚤어진 집착을 좀처럼 버리지 못했던 것. 오히려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A 씨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날이 갈수록 자라났다. 결국 A 씨를 다시 찾아나선 B 씨. 하지만 자신을 피해 꽁꽁 숨어버린 A 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B 씨는 예전에 A 씨가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대해 말했던 기억을 더듬어 서울 ○○구에 거주하던 A 씨의 어머니를 무작정 찾아갔다. A 씨의 어머니는 딸의 주소에 대해 일체 함구했지만 B 씨는 집 안에서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다른 동네에 위치한 △△시장 이름이 새겨져 있는 수건을 발견했던 것.
그날 이후 B 씨는 △△시장에 매일같이 나가서 A 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몇날며칠 시장을 헤집고 다닌 결과 B 씨는 마침내 A 씨와 맞닥뜨리게 됐던 것. 이때가 93년 여름, 잔인한 계절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설마 날 모른다고 하진 못하겠지? 얼굴은 그대로네.”
음흉한 웃음을 띠며 자신의 앞에 불쑥 나타난 B 씨의 얼굴은 A 씨에게 악마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B 씨를 보는 순간 A 씨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간신히 잠재워놓았던 과거의 악몽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한 여자로서 겪어야 했던 그때의 충격과 고통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었다. 후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서 있던 A 씨에게 소름 끼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놀라? 난 이리도 반가운데. 우리 이렇게 쉽게 끝날 사이 아니잖아?”
“우리 참 재미있는 인연이지? 왜, 너랑 나 사이에 ‘근사한 비밀’이 있잖아. 근데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어. 설마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경기도에서 작은 농장을 운영하고 있던 B 씨는 당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감당하기 벅찬 삶의 무게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A 씨와 마주쳤을 때 그는 악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A 씨는 두려웠다. B 씨가 자신을 찾아온 이상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B 씨는 추악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색을 보니 잘 살고 있나 보네? 그 사건… 지금 네 남편도 알아? 알면 기절하겠지? 애들도 충격이 클 텐데.”
상처를 딛고 어렵게 찾은 현재의 행복이 깨어질까 두려웠던 A 씨는 B 씨를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자였다. 울며불며 애원하는 A 씨에게 그는 ‘폭로’를 운운하며 파렴치하게 돈을 요구했다.
“비밀을 숨기고 결혼생활을 유지해오느라 고생 많았어. 더러운 과거를 숨기고 어떻게 결혼할 수 있니? 뻔뻔하기도 하다. ‘순결하고 착실한 아내’ ‘다정다감한 엄마’로 사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안 그래? 그런데 이제 어쩌나….”
A 씨는 혀를 깨물고 죽을지언정 여지껏 지켜온 가정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그 사건’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A 씨는 ‘입막음’용으로 B 씨에게 1000만 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B 씨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A 씨를 찾아와 금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A 씨를 수도권 인근의 모텔로 끌고 다니며 수시로 유린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A 씨가 반항하려 하면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심신이 다시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A 씨는 결코 가정을 깨뜨릴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해봤지만 가족들이 받게 될 충격을 상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또 자신에게 안정을 되찾아주었던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진다면 B 씨에게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A 씨는 B 씨의 요구를 몇 번 들어주면 이내 단념하고 협박을 그만둘 것으로 여겼다. 그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A 씨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A 씨가 감히 신고하지는 못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B 씨의 만행은 날로 더 심해졌다. B 씨는 A 씨가 자신의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면서까지 가족들에게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교묘히 악용했다.
B 씨를 다시 만난 날 이후로 A 씨의 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언제 또 그가 연락을 해올까’ ‘이번엔 또 얼마를 요구할까’ ‘가족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불쑥 나타나지나 않을까’ ‘혹시 가족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A 씨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 환청이 들리고 B 씨의 환상이 수시로 나타나는 심각한 증세까지 나타났다. 날이 갈수록 가족들 얼굴을 보는 것도 고통스러워졌다. 극도의 공포증과 불안감에 시달리다 못한 A 씨는 결국 B 씨를 신고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배경이다.
“지우고 싶었던 과거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 해도 더 이상 B 씨를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는 A 씨. 그녀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철없던 시절 겪었던 악몽이 평범한 여성으로 살고자 했던 한 여성의 인생에 평생 족쇄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진 B 씨의 범행은 현재 공소시효(7년)가 남아 있는 2000년 이후의 사건들만으로도 그를 처벌하기에 충분했다. B 씨는 무려 45차례에 걸쳐 A 씨를 협박해 모두 9억 4000여만 원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도 모자라 A 씨를 이리저리 끌고다니며 성폭행한 것만도 10여 차례. 영등포경찰서는 지난 5일 B 씨에 대해 강간상해 및 금품갈취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에서 B 씨는 “A 씨를 도저히 잊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변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경찰 관계자들은 “A 씨를 상대로 한 그간의 B 씨의 행동을 보면 ‘애정’으로 인한 스토킹이나 병적인 집착 정도로 보기도 어렵다”면서 “여성으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들먹거리며 상상을 초월하는 협박과 갈취, 성적 유린을 일삼아온 B 씨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질이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B 씨의 엽기적인 범행이 밝혀지면서 A 씨는 무려 34년간이나 이어진 희대의 악연을 끊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처절하게 유린당한 그녀의 육체적·정신적 생채기는 어떻게 달래야 할까.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