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태 어머니 놔두고 아들은 애인과 점심
이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는 사건이 최근 실제로 벌어졌다. 꾸중을 들은 뒤 흉기로 자신을 찌른 아들을 감싸기 위해 강도사건으로 위장하려 한 한 어머니의 모정이 세간에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는 것. 아들이 휘두른 흉기에 복부 등을 네 차례나 찔린 어머니는 과다출혈로 혼절 직전인 상황에서도 “강도를 당했다고 할 테니 어서 도망가라”며 아들을 ‘대피’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강도사건이 아님을 눈치 챈 경찰의 끈질긴 추궁에 아들은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말았다.
안양경찰서는 지난 4월 20일 존속살인 미수 혐의로 공익근무요원 A 씨(23)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A 씨의 어머니 B 씨(49)는 다행히 수술 후 상태가 호전 중이지만 아직 수사에 협조할 수는 없는 상황. 피해자 조사를 위해 병원에 찾아간 형사에게 B 씨가 “아들은 잘 있느냐”고 물은 뒤 갑자기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혈압이 떨어지는 바람에 경찰이 수사를 미루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저 귀하게 키워왔다는 아들 A 씨. 대체 어떻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걸까.
경기도 ○○시의 한 구청에서 공익요원으로 근무 중이던 A 씨. 그런데 지난 4월 18일 A 씨의 아버지에게 구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A 씨가 이틀째 무단결근 중이니 어서 출근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A 씨의 어머니 B 씨는 자고 있던 아들을 깨워서 내보냈다.
그 뒤 오전 11시께, 출근한 줄 알았던 A 씨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놀란 B 씨는 A 씨에게 “왜 다시 들어왔느냐. 어서 출근을 하라”며 꾸짖었다. 그런데 B 씨로부터 꾸중을 들은 A 씨가 갑자기 흉기를 꺼내 휘두르며 B 씨의 옆구리, 복부 등을 찔렀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B 씨. 그러나 B 씨는 의식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도 아들에게 “강도를 당했다고 하겠다. 어서 집안을 흩뜨려놓고 도망가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A 씨는 옷장 서랍 등을 빼놓고 집안을 어지럽힌 후 피 묻은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빠져나갔다. 아들이 나가자 B 씨는 남편과 출가한 딸에게 전화를 걸어 “칼에 찔렸다”고 말했다. 잠시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후송되던 B 씨는 “강도를 당했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린 후 의식을 잃어버렸다.
강도에게 찔린 것으로 생각한 구급대원들이 112에 신고를 해 B 씨가 후송된 병원으로 경찰이 출동했다. 그런데 가족, 친인척들이 다 모였지만 외동아들인 A 씨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경찰들은 일단 수사를 위해 B 씨의 아파트로 갔다. 그리고 현장을 조사하던 중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했다. 가구 서랍 등이 열려 있고 집 안이 어지럽혀지긴 했지만 금품을 뒤지려 했다기보단 일부러 연출된 듯 가지런한 느낌이 들었던 것. 또한 피해자인 B 씨가 피를 많이 흘렸는데도 범인이 묻혀놓았을 특별한 핏자국도 없었다.
또 강도들은 대개 집주인을 밧줄 등으로 결박한 다음 집을 뒤지는 게 보통인데 다짜고짜 흉기로 찔렀다는 점도 의심스러웠다. 범행 후 도주하기에 불리한 10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피해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 설치된 CCTV를 분석한 결과 특이할 만한 방문객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CCTV 화면을 분석하던 경찰은 사건 당일 오전 9시 넘어 집을 나서던 아들 A 씨의 옷이 뒤늦게 병원에 나타났을 때 입고 있던 옷과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탐문수사를 벌이던 중 119구급대가 도착할 당시 A 씨가 아파트 후문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경찰은 A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고 증거들을 입수한 후 그를 추궁한 끝에 새벽녘쯤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A 씨가 범행 뒤 아파트에서 나가는 장면이 CCTV에 잡히지 않은 것은 카메라를 피해 계단으로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A 씨는 최근 공익 근무지에 휴가를 내고 나가지 않았던 적이 많으며 사건 당일 전에는 무단결근까지 연이어 했는데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경찰 조사에서 A 씨는 “사는 게 답답한 점이 많아 죽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서 쓰던 칼을 내 방에 보관해놓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용돈도 잘 주지 않고 꾸중까지 해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그런데 가족들이 경찰 조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A 씨는 평소 컴퓨터 게임에 매달려 있을 때가 많았지만 벌레 한 마리 못 죽일 만큼 여린 심성의 소유자였고 어머니 B 씨는 외동아들인 A 씨를 특히 귀하게 키워왔다고 한다. A 씨가 어머니에게 반감을 가질 만한 이유가 전혀 없기에 가족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A 씨는 패륜을 저질렀음에도 의외로 ‘태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범행 후 어머니 B 씨가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있을 시간에 직장인인 애인을 만나 점심을 함께 먹었고 구속된 후에는 경찰에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해서 애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어머니의 안부가 궁금해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애인에게 ‘좋은 아침’이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더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경찰은 어머니 B 씨가 안정을 되찾는 대로 피해자 조사를 거쳐 사건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어머니 B 씨가 병원을 찾은 형사에게 던졌던 첫마디는 “아들은 잘 있느냐”라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현재 유치장에 있는 A 씨는 그런 어머니를 과연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평범했던 한 가정을 순식간에 불행의 늪으로 몰아넣은 이번 사건은 수사를 담당한 경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씁쓸함을 안겨주고 있다.
장유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