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훨훨 날아라 이제 맘껏 응원할테니
허재 KCC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진제공=KBL
허재 감독은 지난 2005년 신선우 감독에 이어 KCC의 두 번째 감독으로 부임했다. 10년 동안 KCC를 이끌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 2009년과 2011년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고, 2010년에는 준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12-2013시즌부터 센터 하승진이 공익근무요원으로 전력에서 제외됐고, 에이스로 거듭났던 김민구마저 교통사고로 선수 생명에 위기를 겪으면서 팀 전체가 흔들렸다.
허 감독은 두 시즌 동안 머리카락이 빠지고 흰머리가 늘어날 만큼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하승진이 돌아오는 이번 시즌을 기다렸고, 안양 KGC 인삼공사에서 가드 김태술을 영입하며 제대로 부활하기를 소원했다. 김태술을 데려오기 위해 팀의 에이스 강병현과 유망주 장민국을 내줄 만큼 허 감독은 김태술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그러나 하승진에 이어 김태술마저 부상으로 빠지면서 허 감독의 고민은 깊어만 갔고, 결국 지난 8일 창원 LG와의 홈경기에서 67-87로 대패 후 사퇴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농구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허 감독이 사퇴를 놓고 고민했었다는 후문이다. 허 감독과 가깝게 지내는 농구인 A 씨는 “하승진이 부상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믿었던 선수들이 뛰지 못하면서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다”면서 “술 마실 때마다 ‘팀을 위해선 내가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두 시즌은 성적 부진에 대한 해명이 가능했지만, 올 시즌까지 하위권에 머문 데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허 감독으로선 사퇴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 아들과 프로에서 함께할 수 없는 운명
허웅
아버지의 명성으로 인해 중학교 때부터 관심을 이끌었던 허웅은 ‘농구계 로열패밀리’의 대표적인 인물. 연세대 3학년을 마치고 조기에 프로행을 택했지만 시즌 초반까지만 해도 동부의 전술과 프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벤치 신세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를 바꾸는 조커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다소 정적인 농구를 펼치던 동부 전술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허 감독은 아들이 프로에 들어오면서 내색하지 않고 신경을 많이 썼다. 그도 농구 감독 이전에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론 아들의 성적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 더욱이 허웅이 속한 원주 동부는 허 감독의 마지막 프로팀이었고 김영만 감독은 허 감독과는 절친한 선후배 사이이다.
아들이 아니었으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허웅의 존재로 서로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허 감독으로선 아들의 성장에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무심한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했고, 아들과 함께 프로 생활을 공유한다는 데 대해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허 감독 지인, A 씨의 말을 옮겨 본다.
“농구계가 이리저리 얽혀 있는 관계이다 보니 허재 감독 아들 허웅도 프로 첫 해가 힘들었을 것이고, 아버지 허재도 팀 성적과 함께 아들의 경기력을 챙기면서 말 못할 어려움이 와 닿았을 것이다. 아들이야 농구에만 전념하면 되지만, 아버지는 그 외의 것들까지 신경 쓰느라 꽤 마음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웅이가 연세대 재학 중일 때 허 감독이 종종 아들 경기를 보러 농구장을 찾곤 했었다. 그때도 행여 대학 관계자들에게 부담을 줄까 싶어 경기만 보고 바로 떠났었다. 그런데도 소문이 무성했다. 아버지가 아들 농구에 관여한다고.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그것은 정말 허 감독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허 감독은 사석에서도 기자한테 “웅이와 훈이가 프로에서 활약하면 난 농구계를 떠나야 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허웅의 프로 데뷔 첫 해, 아버지 허 감독은 팀의 성적 부진과 맞물려 사퇴 시기를 일찍 앞당긴 것이다.
# 용산고 패밀리, ‘종신 감독’은 없었다!
KCC 정상영 명예회장의 농구 사랑은 유명하다. 농구단의 발전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한국 농구 최고의 스타인 허 감독을 일찌감치 사령탑으로 영입해 우여곡절 속에서도 끊임없는 신뢰를 보냈다.
지난해 11월 4일 KCC와 전자랜드의 경기에서 허재 KCC 감독이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는 모습. 사진제공=KBL
KCC 오너가는 모두 용산고 출신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이 용산고 6회, 정몽진 KCC 회장이 30회, 그리고 KCC 구단주인 정몽익 사장이 31회 졸업생이다. KCC 최형길 단장도 31회로 정몽익 구단주와는 동창 관계. 여기에 35회 졸업생인 허 감독이 합류하면서 KCC 구단은 오너가와 단장, 감독이 ‘용산고’라는 학맥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바람 잘 날 없는 프로농구 감독 자리를 10년 동안 이끌어갈 수 있는 데에는 허 감독의 지도력과 오너가의 든든한 믿음이 한몫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농구계에서는 허 감독을 향해 KCC ‘종신 감독’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KCC 오너가도 계속되는 성적 부진에 아들, 형제애로 인연을 이어온 허 감독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형식은 자진 사퇴이지만, 내부적으로 올 시즌을 마치고 허 감독의 지도력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대두됐다는 후문이다. 즉 KCC에서도 허 감독의 자리를 놓고 고민 중이었고, 이 과정에서 사퇴 의사가 전달되자 만류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
허 감독은 ‘종신 감독’이란 말을 상당히 싫어했다. 자신의 지도력보다는 오너가와의 친분이 부각되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감독 자리가 좋다고 해도 성적부진에 대한 허탈감과 압박감을 안고 가면서 그 자리에 눌러 앉아 있을 그가 아니었다. ‘용산 패밀리’들은 만날 때처럼 헤어질 때도 ‘쿨’했다.
한편 수장을 잃은 KCC는 차기 감독으로 유력했던 추승균 감독대행이 맡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9위 KCC와 10위 삼성의 감독이 KCC에서 ‘이(이상민)-조(조성원)-추(추승균)’ 트리오를 결성해 KCC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주인공이란 사실. 추승균 감독대행과 이상민 감독은 서로 꼴찌만은 피하자며 탈꼴찌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감독대행과 감독 선임 첫 시즌이 걸려 있는 만큼 시즌 마칠 때까지 하위권 자리다툼은 상위권 못지않게 치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